지구 반대편에서 붙인 편지

아르헨티나 바릴로체 5

by 쏭작가



친구들이 여행을 가면 그곳에서 보내주는 엽서를 받는 일이 난 그렇게 좋았다.


내가 가보지 못한 나라에서, 낯선 풍경과 낯선 우표와 낯선 향기를 담고 친구의 익숙한 글씨로 받아보는 엽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짜릿한 행복이었다. 생각해보라. 멀리 여행을 가서 나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 줄 친구가 많은가?


엽서를 보낸다는 건, 짧은 일정 속에서, 어쩌면 하루 종일 돌아다녀 피곤한 몸뚱이를 겨우 침대에 누이고 다음 날 여행을 위해 1분이라도 더 쉬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을 떠올리며 시간을 내어 엽서 한 장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엽서를 다음 날 소중히 가지고 나가서 루트 중에 우체국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또 우체국에 들러 커피 한잔 값 정도를 아껴 우표를 사서 붙인 다음 나에게 보내는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소중한 엽서 한 장이, 겨우 이 종이 한 장이, 지구 반대편까지 분실되지 않고 우리 집 우편함에 고이 꽂혀 있는 것이다.

가끔 여행을 가는 몇몇 친구들에게 그곳에서 시간이 되면 엽서 한 장을 써서 보내줄 수 있느냐고 물었고, 고맙게도 친구들은 대게 내게 엽서를 써 보내주었다. 때론 이런 말이 '선물 사 와'라는 말 보다 더 어렵고 미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얼마나 수고로운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친구들이 여행을 가서 내게 보낸 엽서가 소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으농이는 내가 고3 때 '신혼여행은 지구 반대편으로 가야겠어'라고 다짐했던 그 순간, 내 앞자리에 앉아 있던 친구였다. 내가 수업시간에 졸면 어김없이 지우개를 콩만 하게 떼어 나에게 던져주던 친구. 몇 번 그렇게 해도 내가 깨지 않자 문방구에서 1000원짜리 대왕 지우개를 사서 더 큰 뭉치로 던져주던 친구. 언제나 누구에게나 기분 좋은 하이텐션을 퍼트려서 소심하고 조용했던 나 마저도 아주 밝고 신나는 성격으로 바꿔 준, 내 소중한 친구.


몇 년 전 으농이는 남자 친구와 함께 스페인으로 여행을 갔다. 가까운 곳으로 가려고 했는데 보다 보니 스페인까지 보고 있더라고. 스페인에 가도 될까, 하고 고민하던 으농이에게 나는 적극적으로 가라고 했다. 갈 수 있다면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그렇게 떠난 스페인에서 으농이는 남자 친구에게 프러포즈를 받았다며 엽서를 보내왔다. :)


그리고 얼마 뒤, 결혼을 하며 내게 이런 말을 남겼다.



얼른 너의 진가를 온전히 아껴줄 좋은 사람이 나타나길!


그 당시의 나는 지옥불 같은 연애에서 빠져나온 뒤에도 구렁텅이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세상에 좋은 남자는 없다, 다 그렇고 그렇다, 연애는 더더욱 특별할 것도 없고, 놀이공원 회전목마 앞에서 몇 년에 한 번씩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진을 찍는 것, 그런 게 연애인 것이다, 막 이런 암흑 기운을 뿜어내던 시절이었다.

그때 으농이가 내게 남겨 준 저 말은 마음에 부적처럼 착, 달라붙었다. 마치 영화 <어바웃 타임>의 고백씬처럼 조용하고 예쁜 으농이의 프러포즈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으농이가 내게 저런 말을 건네줄 수 있었던 건, 남자 친구가 그런 사랑을 주었기 때문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으농이의 진가를 온전히 아껴줄 좋은 사람이었다. (지금도 물론, 아주 예쁘게 잘 살고 있다 :) )


그 뒤로 나는 오랫동안 나의 진가를 온전히 아껴줄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KakaoTalk_20210716_102008269.jpg 으농이가 내게 보내준 엽서. 부적처럼 방에 붙여 두었었다.



그렇게 바라던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해맑이.

지구 반대편이 아니라 내가 가는 어디에라도 다 함께 가겠다는 사람이.

그리고 그와 함께 나는 지금 지구 반대편에 와 있었다.


으농이 에게는 꼭 지구 반대편에서 엽서를 써서 보내고 싶었다.


너와 함께 들었던 수업에서 다짐했던 대로

나는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에 와 있다고.

언젠가 네가 보내준 엽서에 적힌 네 말처럼

나의 가치를 온전히 알아봐 주는 사람과 함께 와 있다고.




엽서는 한달쯤 뒤에 잘 도착했다 :)
바릴로체 시내 중간쯤 있었던 우체국. 시골 우체국이 생각나 따뜻하고 정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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