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거면 여행을 왜 해요?

이 여행은 정말 폭망한 여행일까

by 쏭작가



폭격을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의 질문에 더 세게 받아치지 못하고 그대로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억울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이런 말을 면전에 대놓고 던지는 그의 순진한 오만함에 보기 좋게 어퍼컷을 날려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어퍼컷을 날릴 만한 거창하고 그럴싸한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1일 1도시 1비행 아르헨티나 일주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릴로체의 짧은 하루를 뒤로 하고, 다음 날 새벽 우리는 엘 칼라파테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동이 트기 전부터 짐을 꾸려놓고 야무지게 조식을 챙겨 먹는 중이었다. 7시가 지나고 나니 부지런한 사람들이 몇몇 일어나 공용 식당으로 나왔다. 그중에서 그는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같은 한국인을 만나 반가웠던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눴다.

그는 30대 한국인 남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이직한 회사로 출근하기 전에 한 달 동안 남미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대부분 남미 여행자들이 가는 코스를 두루 다 들리는 중이었다. 이과수, 부에노스 아이레스, 우유니와 티티카카(! 내 로망.. 우유니와 티티카카... 여기서 난 졌다...), 그리고 바릴로체를 여행 중이었다.


"남미에 와서 우유니와 티티카카를 안 가셨다고요?"

"도저히 일정이 나오질 않아서 못 갔어요."

"아... 아쉽네요, 거기 정말 좋았는데. 오늘은 어디로 가세요?"

"엘 칼라파테로 가요."

"아, 거기 좋죠! 빙하 트래킹도 하시죠? 바로 옆에 엘 찰튼도 정말 좋은데."

"빙하 트래킹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예약을 못 했는데 가서 여쭤보려고요."

"아... 빙하 트래킹 못 하시면 엘 찰튼 꼭 가보세요. 거긴 칠레 쪽인데 다들 트래킹 하러 많이 가더라고요."

"아, 엘 찰튼... 좋을 것 같네요. 근데 저흰 다음 날 우수아이아를 가야 돼요."

"네??? 오늘 엘 칼라파테로 가는데 내일 우수아이아를 간다고요?"

"네... 저흰 시간이 많이 없어서요."

"일정이 어떻게 되는데요?"

"오늘 엘 칼라파테 갔다가, 내일 우수아이아 갔다가, 모레 다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가요."

"네??? 그게 하루 만에 다 봐져요? 바릴로체는 언제 오셨는데요?"

"어제요."

"아니, 그게 가능해요? 시간이 없으시면 차라리 바릴로체를 포기하고 엘 칼라파테에서 더 머무시지..."

"바릴로체 너무 좋은데 여길 포기하라고요? 그럼 진짜 후회했을 것 같아요."

"아, 그쵸. 바릴로체 너무 좋긴 하죠. 근데 하루에 한 도시면 제대로 못 보지 않아요?"

"많이 못 보긴 하죠. 어제 도착해서 겨우 산책 한 번 하고 초리판 샌드위치 사 먹고 아사도 사 먹은 게 끝이었어요."


"아니, 그럴 거면 남미 여행을 왜 해요?"



아... 다시 생각해도 이건 타격이 크다.




대부분의 남미 여행자들이 모두 비슷하게 시간을 두둑이 챙겨서 비행기를 탄다. 한 달 혹은 두 달. 혹은 그보다 더 많이. 1년 동안 세계를 여행하며 남미에 들린 사람들도 아주 많다. 지구 반대편까지 오기가 쉽지 않으니까. 보통은 12시간씩 걸리는 비행기를 두 번 타야 남미에 도착한다. (2017년 7월부터 아에로멕시코 항공사가 서울-멕시코시티를 잇는 직항 노선을 신규 취항했다. 편도 13시간! 덕분에 서울에서 남미로 가는 길이 빨라졌고, 칸쿤으로 신혼여행을 가는 부부도 많이 늘었다. 우리가 남미 여행한 때는 17년 3월이었으므로 아에로 멕시코 취항 전이라,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 환승 포함 30시간이 걸렸다.)


남미에 다녀온 사람들은 우리를 한사코 말리기도 했다. 가기 어려운 남미를 7박 8일 동안 다녀오는 게 말이 되냐고. 그럴 바엔 차라리 나중에 1~2달 쉴 수 있을 때 가라고. 맞는 말이다. 근데... 그게 제 인생에 언제일까요...? (또르르) 찾아보면 남미 여행자들은 모두 퇴사자, 이직자, 휴학생 등등... 어쩜 그렇게 다들 시간이 많은지. 진심으로 너무너무 부러웠다. 우리는 회사를 때려치울 용기가 없었다. 돌아가면 전세자금 대출을 갚아줄 일이 필요했고, 안정적인 삶을 준비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미를 나중으로 미루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가 돼서 가긴 싫었다ㅠㅠ)




그의 여행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여행이 한 달쯤 더 남은 그는 우리와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어떤 선택을 할까.


"이제 어디로 가세요?"


그는 어디로 갈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바릴로체에 이틀 머물 예정이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너무너무 좋아서 4일째 아침이라고. 내일쯤엔 어디로 떠날지 확실히 정해야 하는데 아직 고민 중이라고. 자기도 엘 칼라파테로 넘어갈 건데, 여기서 알게 된 사람들이 엘 찰튼에서 캠핑 중이라고 해서 그쪽으로 넘어가서 합류할 건지 말 건지 고민 중이라고. 나는 그의 고민이 너무너무 부러웠다. 넉넉한 시간 속에 여러 가지 선택지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게.


"혹시 남미 여행자들 모여 있는 단톡방에 계세요? 여기 단톡방 안에 있는 분들 정말 대단한 분들 많으세요. 저도 많이 알아보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계신 분들은 어떻게 알고 여행하시는 건지, 책이나 카페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곳에 가서 트래킹하고 캠핑하고 여행하시더라고요. 저도 이 단톡방에서 정보 많이 얻었어요. 혹시 안 계시면 초대해 드릴까요?"


그의 친절 덕분에 우리도 단톡방에 입성하게 되었다. 실제로 그 톡방 안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아주 멋진 곳들을 여행 중인 분들이 많았다. 여행이 끝난 밤마다 그 톡방을 보며 한편으로 자꾸 불행해졌다. 같은 남미에 왔는데, 같은 아르헨티나에 있는데, 나만 뭔가 제대로 못 보고 수박 겉핥기식으로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구석구석 더 멋진 곳, 남들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 저스트 고 남미 편에 나오지 않은 새로운 곳들을 여행하고 있을 단톡방 속의 그 사람들이 대단하게 느껴지면서 진정 남미 여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상하게 왠지 진 것 같은 기분을 며칠 느끼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런 여행을 하는 나는 행복하지 않은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확실하게 행복하다.

지구 반대편에 평생을 함께할 사람과 함께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냥 행복했다.

와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지구 반대편의 삶과 풍경들 속에 우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물론, 우리에게도 시간이 아주 넉넉했다면 그들처럼 '오늘은 뭐하지? 내일은 어디 가지? 이 도시는 언제쯤 떠나볼까?' 하는 고민들을 천천히 음미하며 행복한 여행을 했겠지만, 주어진 시간 속에서 가고 싶었던 곳을 다 가보고 온다는 것에도 분명히 행복은 있다. 바릴로체에서 먹고 싶었던 아사도를 먹었고, 엘 칼라파테에서 빙하 트래킹도 할 거고, 우수아이아에서 펭귄 투어도 갈 거니까.


그래, 그러면 됐다.

어떠한 형태의 여행이든, 여행하는 내가 행복하면 됐다.


아니, 또 여행하는 내가 조금 힘들고 불행하면 어떤가. 여행은 결코 힘들고 불행한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힘든 여행이었더라도 여행에서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아주 큰 안락과 안도감을 주지 않는가. '아, 역시 집이 최고야. 돌아 올 집이 있어서 감사하다.' 하는 생각과 함께. 그럼 그 또한 그걸로 된 것이다. 여행 속에서 찾고 싶었던 행복이 집에 있었을 뿐인 것이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여행은 다시 돌아가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고. 나는 이렇게, 힘들고 괴로웠던 일들이 여행이 끝나고 나면 그 마저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 것을 좋아한다. 여행이 부리는 장난을 좋아한다.


그러니 혹여나 '이렇게 여행해도 될까?' 망설이는 분들이 계시다면 꼭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여행해서 행복하다면, 그렇게 여행해도 되는 거라고. 'OO에서 꼭 봐야 하는 것 BEST 5', 'OO에서 꼭 먹어 봐야 하는 것 BEST 5' 이런 거 다 해 본다고 여행을 잘하고 오는 것도 아니고, 이런 거 다 못하고 와도 내가 즐겁고 행복했다면 여행을 잘하고 오는 거라고. 그러니, 내가 가는 곳이 어디든, 일정이 어떻게 되든,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떠나시라고. (망할 코로나가 어서 끝나기를요)



여행은 여행 그 자체로 충분히 할만한 가치가 있다.








하마터면 이렇게 멋진 바릴로체를 못 볼 뻔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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