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위치와 와인 한 병, 그리고 공원만 있으면 돼
드디어!
12일간의 여행 중에서 아무 일정이 없는 날이 시작되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세수만 간단히 하고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어제 아침에 봐 두었던 창가 자리가 비어 있었다. 조그마한 골목에 위치한 터라 창밖의 풍경이란, 도로 양 옆으로 빼곡히 주차되어 있는 차들 뿐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테이블 한편엔 하얀 국화가 풍성하게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람쥐처럼 테이블 위로 접시를 하나씩 날랐다. 커피와 바나나, 크로와상과 식빵, 그리고 이제는 빼놓을 수 없는 둘쎄 데 레체도 듬-뿍.
"오늘은 아무것도 할 게 없네!"
해맑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 오른다. 언행불일치의 행복. 그동안 자꾸만 어딜 가야 하는 일정에 조금 지쳤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뭐 하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지 '레콜레타', 프리다 칼로의 그림이 있는 라틴아메리카 미술관, 탱고의 발상지 '라 보카', 세계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서점 '아테네오', 예술가들이 사랑한 카페 '토르토니'... 아직 안 가 본 곳은 많은데 어디부터 가야 할지 도통 모르겠던 그때,
"오늘 날씨 좋으니까 공원 갈까?"
해맑이 말했다. 가까운 곳에 팔레르모 공원이 있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가장 큰 공원으로, 부에노스 아이레스 사람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공원. 하늘도 푸르고, 바람마저 걷기에 따뜻한 날씨. 공원 피크닉 하기에 완벽한 날이었다.
우리는 서둘러 씻고 공원을 향해 나섰다. 가는 길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러 와인도 한 병 샀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첫날 밤에 마셨던 와인과 같은 회사의 와인으로, 이번엔 화이트 와인을 골랐다. 한 병에 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정말 훌륭한 맛. 이 화이트 와인마저 맛있다면... 그건 좀 괴로울 것 같다. 다 가져가고 싶을 것 같아서.
공원이 가까워질수록 도로가 넓어졌다. 공원길을 따라 걷는데 강아지 10마리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아저씨도 보였다. 아르헨티나에만 있는 직업*, '개아범'. 개를 무척 사랑하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집집마다 개를 키운다. 사람들이 모두 집을 비운 낮에, 혼자 있을 개들이 심심하지 않도록 '개아범'에게 산책을 맡기는 것이다. 산책을 하다 쉬는 시간인지, 개들은 커다란 나무 밑 그늘에 누워 모두 잠을 자고 있었다. 참, 따뜻한 풍경이다.
* 지금은 Pet Walker라는 직업이 전 세계적으로 더 많이 생겨났다. 아르헨티나 특히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길을 걸을 때면 정말 흔하게 개아범들을 볼 수 있다. 아범이라고 해서 남자만 이 직업을 하는 것은 아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는 개 전용 공원도 있어서, 그곳에서 목줄 없이 마음껏 뛰놀 수도 있다.
공원 입구에 다다르자 일차선 도로와 횡단보도가 나왔다. 간혹 차 한 대씩 지나다니는 샛길이었는데, 웬걸? 어디에선가 오리 무리가 줄지어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정확히 횡단보도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때, 횡단보도를 향해 차 한 대가 달려갔다. 어어, 어떡하지??? 우리와는 100미터쯤 떨어진 거리였고, 오리도 차도 거침없이 돌진하고 있었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던 순간,
차가 멈춰 섰다.
오리들은 당황하거나 주춤한 기색도 없이 당당하게 횡단보도를 건넜다. 세상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오리들을 위하 차를 멈춰주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이라니. 오리를 피해 (위협적으로) 차를 몰지 않았고, 오리들에게 비키라고 경적을 울리지도 않았고, 길을 건너는 오리들에게 잠깐의 시간을 내어준 운전자. 어쩌면 당연한 풍경 앞에 우리는 뭉클했다.
간디는 '그 나라의 인권 수준과 도덕성은 동물을 대하는 태도로부터 알 수 있다'라고 했다. 이 한 장면으로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마음씨가 어느 정도인지 한방에 다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호수의 주인은 어쩌면 저 오리들일지도 모른다. 오리들의 집에 인간이 마음대로 길을 내고 도로를 깔아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공원 쪽으로 길을 건너자, 이번엔 코를 자극하는 이 맛있는 냄새!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냄새의 진원지를 찾아 나섰다.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빨간 간이 상점! 바로 저곳이었다. 아무런 표시도, 간판도, 메뉴도 없는 이곳! 그릴 위에 노릇노릇 익어가고 있는 것들이 직접 메뉴를 말해주는 곳. 역시, 초리조 가게였다. 망설일 것도 없이 초리조 샌드위치 2개를 샀다. 와인도 있고, 초리도 샌드위치도 있으니 점심까진 거뜬하겠다!
어디에 앉으면 좋을까 걷다 보니 호수가 나왔다. 우리는 호수를 향해 걸음이 빨라졌다. 그런데 우리처럼 걸음이 빨라진 것들이 또 있었으니... 바로, 오리 떼! 대체 어디에 있다가 이렇게 많은 오리들이 한꺼번에 달려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수십 마리의 오리들 또한 우리처럼 호숫가로 떼 지어 달려가는 중이었다. 2살 정도 돼 보이는 꼬마 아기가 오리를 보더니 좋아서 꺄르르 꺄르르, 웃었다. 오리들은 사람을 피하지도 않고 공원을 활보했다. 함부로 다가가거나 만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오리들 역시 사람들을 경계하지 않고 편하게 공원에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호숫가 가까이에 있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간단한 점심 피크닉을 시작했다. 아르헨티나에서 먹은 초리조 샌드위치는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날이 갈수록 왜 점점 더 맛있어지는지, 오늘 먹은 초리조 샌드위치가 제일 맛있었다. 화이트 와인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다. 직업을 와인 수입상으로 바꾸고 싶을 만큼 맛있었다.
따뜻한 햇살과 잔잔한 호수와 기분 좋은 바람과 낯가림 없는 오리들과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초리조 샌드위치와 와인. 그리고 해맑.
"아, 오늘이 제일 좋다!"
풀밭에 벌러덩 드러누울 기세로 몸을 젖히며 해맑이 말했다.
그런 해맑의 얼굴 위로 반짝반짝한 햇살이 쏟아져내리는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