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내가 쓴 에세이가 하나 남았다
나의 신혼여행기가 드디어... 끝이 났다.
신나게 쓰기 시작했다가, 내가 이걸 써도 될까, 재밌게 읽을 만한 글인가, 누군가 좋아해 줄까, 이걸 에세이라 불러도 좋은가.... 괴로워하다 남편을 두고 2주 동안 혼자 제주에 내려가 글을 쓰기도 했다. 퇴사를 하며 '여행 에세이를 쓰려고요'라며 호기롭게 동료들에게 말했던 게 생각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지도 벌써 1년이 지나고 있었다. 나의 에세이를 기다리고 있겠다던 동료들도 까맣게 잊었을 것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괴로움 끝에 겨우 겨우 원고를 다 썼다. 그런데 노트북이 고장 나 허무하게 원고를 다 날려버렸다.
원고가 날아간 건, 이 이야기를 책으로 내지 말라는 신의 계시인가. 낙담하였다. 그래도 다행인 건... 누군가에게 내 원고가 읽혀 원고지가 박박 찢어져 없어진 건 아니니까. 이 이야기가 책이 되든 쓰레기가 되든 어찌 되었던 이건 내 이야기였으니까.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기록해두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이상하게도 다시 처음부터 글을 쓰려고 보니 '이건 에세이가 맞나, 내 일기 아닌가'하는 물음에 자신감이 생겼다. 일기가 아니라, 에세이로 쓸 수 있는 기준이 생긴 것이다. 차례로 원고의 목차를 써 내려갔다. 총 60개 남짓한 목차가 생겼다. 욕심내지 말고, 하루에 하나씩 쓰자고 생각했다. 그럼 두달이면 다 쓸 수 있다. 열심히 썼다. 어쩌다 하루 건너뛴 날이 있으면 그다음 날에 두 개를 쓰기도 했다. 두 달 남짓이 지나자 글을 다 썼다. 쓴 글을 모두 프린트 해 보니 꽤 묵직한 원고 뭉텅이가 되었다. 열심히 퇴고도 했다. 다 됐다. 이제 출판사에 출판제안서를 보내기만 하면 된다.
인터넷에서 출판제안서 양식을 몇 개 찾아보았다. 차분하게 써 내려가다 '경쟁 도서와 그 도서와의 차별점'에서 막혔다. 교보문고에 가서 여행 에세이 코너의 책들을 쭈욱 훑어보았다. 몇몇 도서들이 경쟁 도서 후보로 올랐다. 그런데... 도저히 그 책들을 '경쟁 도서'로 꼽고, '그 책 보다 내 책은 이런 게 더 나아요!'라고 써 내려갈 수가 없었다. 내 글이 못나고 안 못나고를 떠나서, 그 책을 쓴 작가님들도 얼마나 어렵게 쓴 책이었을까, 내가 내 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처럼 그 작가님도 그 책을 아끼고 사랑했을 텐데. 감히 그 책을 꼽아서 내 글이 더 좋은 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런다고 누가 책 팔아주냐?
맞다. 이런 내 마음을 누가 알아줘서 '아이고 작가님 마음이 너무 여리시네요, 제가 도와드릴게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출판제안서를 쓰는 작가들이라면 다 쓰는 것일 텐데, 제가 쓴 글이 이렇게 멋집니다, 아주 그냥 죽여줘요, 하고 자랑을 해도 모자랄 판에... 나에겐 너무나 잔인했던 출판제안서 '경쟁 도서와 차별점'. 그 때문에 글을 다 쓰고도 또다시 하드 깊숙한 곳에 묻혀버렸다.
간간히 '책 언제 나와?'하고 물어주던 친구들도 더 이상 책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그 사이 나는 점점 읽지도, 쓰지도 않게 되었다.
그 사이 나는 안정적이고 편한 길을 택했다. 방송원고를 쓰는 일. 내가 제일 잘하는 일. 내가 쓴 글이 출연자의 입으로 말해져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걸 보면 뿌듯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냥 그 출연자가 한 말인 줄 안다. 그럼에도 좋았다. 그래도 누군가는, 몇몇은 내가 쓴 원고라는 걸 알 테니까. 어린애처럼 자랑하고 싶을 땐 해맑에게만 했다. '오빠 오빠! 이거 내가 쓴 멘튼데, 사람들이 엄청 좋아했다?!'
누구보다 내가 쓴 글을 기다리던 해맑이 어느 날 문득 내게 말했다.
"난 네가 네 글을 썼으면 좋겠어."
그 말에 마음속 깊이 꼭꼭 가둬둔 감정들이 한 데 쏟아져 뒤엉켰다. 나도 내 글을 쓰고 싶은 마음, 누군가 읽어줄까 하는 두려움, 내 글을 써서 먹고살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함, 글을 잘 쓰고 싶은 욕망, 성공한 작가로 살고 싶은 명예욕까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1부터 10까지의 마음들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에세이를 쓰고 있다고 말했을 때부터 주변에서 추천하는 건 '브런치'였다. '브런치 알아? 거기 사람들이 에세이 많이 쓰던데 너도 거기 한 번 올려 봐.' 진작 가입은 해 두었는데 당시에는 어딘가에 내 글을 올리는 것이 두려웠다. 정제되지 않은 글을 공개해도 되는 걸까. 스스로의 기준이 있었다. 지금은 글을 다 썼고 퇴고도 했으니까 브런치에 올려보기로 마음먹었다. 그제야 브런치 작가 신청을 알아봤는데... 뭐? 17전 18기 브런치 작가 도전기?! 브런치 작가 되기 원데이 클래스?! 와... 브런치 작가가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브런치 작가 등단'인 셈이 되어버렸다.
본업이 방송작가니까, 하고 만만하게 봤던 마음을 싹 지웠다. 브런치 작가 성공 후기를 꼼꼼히 살펴보고, 원고와 목차를 다시 다듬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준비해서 브런치 작가 신청을 눌렀다. '일주일 안에 심사해서 결과를 알려주겠다'는 메시지가 떴다. 괜히 긴장됐다. 떨어지면 어떡하지. 17전 18기로 도전한 사람도 있는데, 또 도전해야지 뭐. 그렇다면 다음엔 어떻게 더 수정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브런치 작가 합격 메일을 받았다.
하루아침에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등단이 된 것 마냥, 당장 내일 누가 책이라도 계약하자고 한 것 마냥 기분이 좋았다. 부끄럽지만... 해맑은 브런치 작가 합격 기념으로 새 노트북을 선물해주었다. 아니, 이러다 내가 책이라도 내면 그땐 뭐 더 좋은 선물을 해주려고 이러느냐고 멋없는 말을 내뱉었지만 내심 너무 기뻤다. 운이 좋았던 걸까. 아무래도 끝까지 다 써 둔 원고와 목차가 한몫했던 것 같다. 노트북 문서 폴더에 새 폴더를 하나 만들었다. 폴더명은 '일단 하자'. 다음 날부터 하루에 하나씩 브런치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브런치 글을 올리며 다른 작가님들의 글도 둘러봤다. 팔로워가 엄청난 작가님들, 몇 년 동안 꾸준히 써 온 작가님들, 글을 올렸다 하면 라이킷 수가 두세 자리는 거뜬한 작가님들... 그 앞에서 나는 또다시 초라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언제쯤 저렇게 될 수 있을까. 글을 올렸는데 사람들 반응이 별로면 어떡하지... 부정적인 마음이 슬금슬금 올라올 때, 폴더명이 눈앞에 두둥- 떴다.
'일단 하자'.
글을 몇 개 올리다 보니 신나는 일도 생겼다. 갑자기 조회수가 폭발한 것이다. 조회수가 1000이 되었습니다, 조회수가 2000이 되었습니다... 조회수가 10000이 되었습니다...! 얼떨떨했다. 이게 무슨 일이람?! 다음 메인화면과 카카오톡 탭 화면, 그리고 브런치 메인에 내 글이 걸린 것이다. 짜릿했다. 글을 썼다 하면 2~3일에 한 번씩 노출되어 조회수가 폭발한 날들도 있었다. 아니, 브런치는 글을 쓰면 다 올려주는 건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다른 브런치 작가님들은 어떠려나? 하고 후기를 찾아봤는데, 어떤 분은 조회수가 10만까지 폭발했다는 글을 보았다. 나는 내 거만함을 조용히 찌그러트렸다.
여러분 보세요! 이 글이 메인에 노출됐어요!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조용히 지우고, 다시 정진했다. 일단 하자. 일단 올리자. 일단, 끝까지 올려보자. 중간중간 다른 작가님들의 출판 계약 소식도 보고, 오디오북 당선작들도 보고... 자신감이 널을 뛰었다. 브런치에 연재도 시작했겠다, 달리 돌아갈 길은 없었다. 일단 하는 수밖에.
그 사이 구독자가 하나 둘 늘기 시작하더니, 어제부로 56명이 되었다. 왠지 쑥스러워서 친구들에게도 말 못 했는데 모르는 분들이 나의 이야기를 구독해주신 것이다. 세상에 내 이야기를 읽고 그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해 주시는 분들이 56명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 같아선 한 분 한 분에게 선물이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람이 이렇게 기쁘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기쁨의 마음이 큰 만큼 불안의 마음도 커져갔다. 내가 쓰는 글들이 마음이 들지 않아 누군가 구독 해제를 하면 어떡할까. 그러다 나중엔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나면 어떡할까. 누군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나는 아주 잘 대답해 줄 자신이 있다. 그런데 참, 스스로에게는 그게 잘 안 된다. 그저 이런 마음을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마음'이라고 다독이는 수 밖에다.
그렇게 시작한 브런치였다. 석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에세이를 올렸고, 어제부로 모든 에세이가 끝이 났다. 이상하게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다. 후련함도 시원함도 뿌듯함도 없었다. 처음 에세이를 올리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 에세이를 다 써갈 때쯤엔 (어디서 나온 근자감인지) 출판 제안이 오지 않을까 싶었다. 에세이를 다 올린 지금은... 글쎄 모르겠다. 분명한 건, 나는 다시 출판제안서를 쓸 것이고, 메일을 보낼 것이다. 그럼에도 또 달라지는 게 없을 수도 있다. 그래도 '일단 하자'고 마음먹었으니 일단 하는 거다. 출판사에 메일을 보내보고, 그래도 다 떨어지면 또다시 글을 쓰는 거다. '일단 하자' 폴더 안에 새로운 폴더 몇 개를 만들었다. 다행인 건, 아직 쓰고 싶은 글들이 많이 남아 있다.
글을 쓴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지만,
내 인생에 내가 쓴 에세이가 하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