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담임교사였던 시절, 학급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다 한 가지 규칙을 정했었다. 늦잠으로 인한 지각,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선생님의 허락 없이 자리를 지키지 않는 일 등에 대해 반성의 의미로 시를 한 편씩 외우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숭고한 문학 작품인 ‘시’를 외우는 것을 벌로 시키다니, 나 자신이 유치하게 생각되고 경험이 부족해 보여 조금 부끄럽다. 아무튼 깐깐한 담임이 만들어 놓은 우리 학급의 시 파일북은 학생들이 하루 동안 외울 수 있을 분량의 시들이 프린트되어 꽂힌 채, 내 책상 위에 늘 비치되어 있었다.
H는 등교 시간에 자주 5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느긋한 성격이었던 H는 한 번도 뛰어오는 일 없이, 늦잠을 자서 버스를 놓쳤다며 내 앞에 서서 작은 목소리로 잘못했다고 말했다. H는 일주일에 평균 2-3개 정도의 시를 외웠는데 한숨을 푹푹 쉬며 시 외우는 것을 힘들어하면서도 지각하는 습관은 고치지 않았다. 오히려 지각을 하는 날이면, 본인이 먼저, “선생님, 오늘은 어떤 시를 외울까요?”라며 무심히 시 파일북을 넘기며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교실을 지나가다 H를 보면, 오물오물 시를 외우며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종례 시간엔 어김없이 교무실 앞에 찾아와 시를 틀리지 않게 암송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옆자리 선생님은 자주 시를 암송하는 H를 예뻐하셔서, 지각을 하지 않아 시를 외우지 않아도 되는 날엔 H가 교무실에 오지 않아 안부를 묻기도 했다.
야간 자율학습을 의무적으로 해야 했던 오래전 이야기이다. 여름 방학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출근을 하니 어제 야간 자율학습 감독을 했던 선생님께서 우리 학급의 많은 아이들이 야간 자율학습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셨다. 출석부를 보니 10명 정도의 학생들이 무단으로 학교를 탈출(!)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 명단에는 반장도 있었다. 나는 학생들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에 화가 부글부글 치밀어 오른 채 교실에 들어갔다. 교실 안은 평소와 달리 적막했고, 학생들이 내 눈치를 보고 있다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나는 반장을 비롯한 어제 도망간 학생들을 일으켜 세워 야단을 쳤고, 학생들은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열지 못했다. 교실엔 험악한 분위기가 흘러갔고, 나는 학생들에게 우선 어제 일에 대한 반성문을 써서 제출하라고 했다. 그래도 학생들이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여 화가 좀 누그러진 나는, 제출한 반성문을 읽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제는 당시 인기가 많았던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가 개봉한 날이었고, 학생들은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단체로 그 영화를 보러 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작당 모의를 주도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반장이었다. 반장은 구구절절 자신의 잘못을 나열하며 정말 깊이 반성하고 반성한다는 뉘우침을 피력했다. 나는 학생들을 벌주어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들을 이해하고 있었다. 얼마나 영화가 보고 싶었으면, 학교를 벗어나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싶었다. 녀석들, 어제 즐거운 추억 하나 만들었겠구나, 싶었다.
그날 그 아이들이 외운 시는 이육사의 ‘청포도’였다. 비교적 길이가 짧아 외우기 쉬웠고, 조건은 10명의 학생들이 박자를 맞춰 틀리지 않게 한꺼번에 낭독하는 것이었다. 종례 시간 교무실 복도에서.
오후 청소 시간이었다. 빗자루로 교정을 쓰는 학생들에게서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는 합창 낭독이 들려왔다. 교무실에 계시던 한 선생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창밖을 보시며 ‘오늘 학생들이 왜 저렇게 청포도를 외우지?’하셨다. 조금 뒤에는 수돗가에서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라는 합창 뒤에 ‘까르르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반 학생들이었다. 밝은 성격의 반장이 큰 목소리로 선창을 하고 나면, 다른 학생들이 따라서 암송하고 있는 것이었다.
초보 교사는 학생들에게 시를 외우라는 벌을 주었지만, 학생들은 그걸 즐겼다. 그리고 어느 순간 교사도 그런 학생들을 보는 것을 즐겼다. 지켜야 할 규칙과 규칙을 어겼을 때 마땅히 주어져야 하는 제재 사이에서 싱그러운 청포도가 열린 마을보다 더 시원한 교정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몇 년 뒤, H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H는 간호사가 되어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나에게 연락한 이유는, 출근길에 전철역 벽에서 예전에 외웠던 시를 발견해서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그리고, 선생님 덕분에 시를 많이 외울 수 있어서 감사했다고, 그때 지각을 많이 해서 죄송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절대 지각하지 않고 성실하게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으니 걱정하시지 말라는 안부를 전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수돗가에 울려 퍼지던 이육사의 ‘청포도’가 가끔 떠오른다. 그리고 그때 그 아이들에게 엄격하고자 했던 초보 교사의 서툰 근엄함이 주저리주저리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