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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건반검은건반 Oct 19. 2021

선생님은 멀리서 너희를 늘 응원하고 있을 거야

그리운 옛 제자들에게

처음 초등교사로 발령이 나서 5학년 담임을 맡았을 때 24살의 어린 선생님은 43명의 선생님이 되었다.

이 아이들이 내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니 사랑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떻게 표현해야 내 마음을 더 크게 표현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초보 선생님은 어디까지 잘해 줘야 좋은지도 몰랐다. 그냥 뭐든 많 잘해주고 싶은 마음만 앞섰다.

아침을 못 먹고 오는 아이들에게는 아침을 챙겨주고 싶었고, 저녁을 못 먹는 아이들에게는 저녁도 챙겨주고 싶었다. "아침을 못 먹고 오는 사람 손들어주세요"라고 해서 콘프레이크를 사서 아이들 편으로 보냈다.  저녁을 못 먹는 아이들을 위해 빵을 사들고 집에 방문했다. 심지어 아이의 체육관까지 찾아가 학원 선생님이랑 같이 드시라고 간식을 넣어주었으니, 참 어떻게 표현해야 사랑인지 모르는 초보선생님의 열정이었다.

그러고 보면 24살의 어린 선생님은 감성이 풍부한 선생님이었다. 아이들에게 애를 썼지만, 아이들은 고마운 마음을 툴툴거리며 표현했고, 어느 순간 나는 아이들에게 만만한 선생님이 되어 함부로 대하는 아이들에  힘겨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내 마음과 상관없이 조금씩 삐뚤어졌다.

옆반 선배님은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위로를 해주셨지만 내가 정말 교사로서 부족하게 느껴졌다.

점점 아이들은 우리 반에서 가장 힘이 센 친구를 나보다 무서워했고, 나는 그제야 아이들에게 엄하게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나의 첫 아이들과의 만남은 이렇게 상처를 남기고 지나가 버렸다.


하지만 다시 해가 바뀌고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4학년이었다. 1년의 (스스로 생각할 때에) 실패를 겪고 나니, 어느 정도의 노하우가 생겼다. 하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예뻤다. 아이들과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함께 소풍을 가고 놀아주고, 일요일에는 모둠 데이트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는 교장선생님에게 결재도 맡지 않고, 학부모들에게 가정통신문도 안 보내고 허락도 없이 간 크게 그렇게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다. 아이들과 주말엔 함께 영화도 보러 갔다. 참 무모했지만 그 순수했던 선생님,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그 해의 아이들은 중학생이 되어서도 중간고사가 끝났다고 찾아오고, 방학이라고 찾아오고, 스승의 날이 되면 학교가 바뀌어도 해마다 나를 찾아와 만났다.


이렇게 제자들이 많아지게 되자 스승의 날이면 찾아오는 아이들을 그냥 보낼 수없어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를 100개를 주문했다. 아이들은 선생님도 만나고 동창들도 만나고 햄버거도 먹고 놀며 스승의 날이면 우리 교실에 여러 나이의 아이들이 다 모였다.


학교를 옮겨도 계속 찾아왔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찾아오니 자랑스럽고 좋았는데 나중에는 다른 선생님들 보기에도 미안했다.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잘해줄수록 계속 찾아왔고 그러다 보니 숫자는 계속 늘어났다. 오지 마라 할 수도 없고, 점점 난감해져 갔다.


그러다가 8년 차에 멀리 통영으로 발령이 났다. 통영에서 근무하는 동안 내 폰 번호도 바뀌며 자연스럽게 제자들과는 소식이 끊기게 되었다. 그렇다고 제자들의 미래를 응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7년을 근무하는 동안 내겐 200명이 넘는 제자들이 생겼다. 계속 오는 제자들의 연락을 받지 않기에는 내가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었고 다 받아주기에는 힘이 들었다. 그리고 결혼하여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 점점 마음의 여유가 없어져 갔다.




2015년, 통영에서 파견도 끝내고, 2년간의 육아휴직을 끝내고 다시 부산으로 복직했을 때 오랜만에 다시 6학년을 맡게 되었다. 6학년 아이들과 행복한 추억들을 많이 만들고 문집도 같이 만들면서 참 좋았다.  

아이들 졸업시키는 날, 마지막 인사를 하며

"10년 후에도 선생님 생각나면 찾아와. 너희들을 마음으로 계속 응원할 거야"라고 말하는데

갑자기 10년 전의 약속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10년 전, 2006년 2월 20일은 우리 반 아이들의 졸업식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6학년을 맡았던 해였던, 2005년에는 아이들과 연애하듯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마, 아이들보다 내가 그 아이들을 더 좋아했을 것이다. 4월 1일 만우절에 내가 다른 학교로 전근가게 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아이들은 엉엉 울어주었고, 6월에는 연인처럼 우리 만난 지 100일째라며 100일 파티도 했다. 나는 그때 27살이었다. 한참 다른 친구들은 남자 친구와 연애할 나이에 나는 아이들과 연애하고 있었다.

우리 반 아이들이 너무 수업태도도 좋고 발표도 잘해서 나는 과감하게 이 아이들을 데리고 수업대회에 나갔다. 피아노를 잘 치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나는 바이올린을 연주해서 대학원 실기시험도 보았다. 아이들과 함께 주말이면 영화도 보러 갔다. 아이들과 연애하느라 너무 바빴다. 남자 친구가 없어도 하나도 외롭지 않았다.

나는 그 6학년 2반 아이들과 헤어지는 게 슬퍼서 많이 울었다. 열심히 만든 학급 문집 제일 앞장에 한 명 한 명에게 편지를 다 쓰며 우리 10년 후, 2016년 2월 20일 오후 2시에 우리 학교 운동장에서 다시 만나자며 부둥켜안고 울었다. 아이들과 그렇게 한 해를 불태웠다.




2016년 2월 19일은 또다시 맡은 6학년 아이들의 졸업식이었다. 아이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며 10년 전의 약속이 떠올랐다. 하루 전날에 떠오르다니! 정말 잊을 뻔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난 것이 정말 신기했다.

아마도 이 아이들의 졸업식이 아니었으면 10년 전의 약속을 잊었을 것이다.

그때 만든 학급 문집은 가지고 있었지만, 내가 가진 문집에는 언제 만나자고 손편지로 적은 나의 편지 없었다. 날짜도, 시간도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2016년 2월 20일 오후 2시로 잡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남편에게 갑자기 10년 전의 약속이 생각났다고 말했다.

"어떻게 하지? 아이들은 분명히 기억하지 못할 거야.

그동안 연락도 한번 하지 않았던 아이들인데....

만약 약속을 기억하고 있더라도 부끄러워서 나올까?

벌써 그 아이들은 24살이야. 부산에 안 살 거 같고, 군대도 많이 갔을 거 같아."


내 말을 들은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생각이 안 났으면 모를까. 생각이 났는데 나가야 되지 않을까?

아무도 나오지 않더라도 옛날 생각하며 운동장 걷기라도 하고 와."


나는 운동장을 여러 바퀴 돌고 오겠노라, 하고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찾은 학교는 예전과 하나도 바뀐 게 없었다.

운동장에서 노는 아이들이 그때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 같았다.

2시부터 2시 20분까지 걸어야지! 하고 운동장을 걷다가

학교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려고 걷는데

"선생님!"하고 누군가 불렀다.

10년 전 우리 반, 상철이와 진우였다.

가슴이 뛰었다. 상철이가 대표로 선생님 모시러 왔다고 했다.

그때까지도 우리 반 친구들은 동창회를 하고 있었고, 그 약속에 대해 친구들은 많이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톡에서 과연 선생님이 올까 안 올까. 이야기를 했는데, 다들 선생님이 안 올 거라고 했단다.

그래서 대표로 그때 반장이었던 진우와 부반장이었던 상철이가 와보기로 했다고 했다. 진짜로 선생님이 왔다는 상철이의 전화에 다른 친구들도 나왔다. 아이들은 우리가 함께 만든 학급문집과 내가 글을 새겨 선물했던 손수건을 들고 왔다.

내가 사랑을 불태웠던 마음을 담아 선물해준 것을 오랜 시간 소중히 간직해준 걸 보니 너무 뭉클했다.

그때 그 13살 친구들이 친구들이 24살이 되어, 모두 8명이 커피숍에 모였다.


그날은, 내가 선생님이 된 이후로 가장 들뜨고 행복했던 날이었다.

아이들과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한참을 수다를 떨었다. 오늘 나오지 못한 아이들의 근황도 들었다. 군대를 간 친구들이 많았고, 서울에 대학을 갔거나, 해외에 유학 갔다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는 다시 2005년의 그때로 돌아가 26살의 열정이 가득한 그때의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스승의 길을 걸으며 때론 행복하기도 때론 지치기도 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한 번씩 쉬고 싶었고, 그만두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지칠 때쯤, 10년 전의 아이들을 만났다.

10년 전에 내 마음을 꽃으로 채워줬던 나의 제자들은 다시 또 내 마음을 햇살로 가득 채워주었다.

 

나는 지금도 아이들을 보내며 이야기한다.

"10년 후에 생각나면 그때 선생님 꼭 찾아와!

하지만 한동안은 선생님 말고, 새로 만날 선생님을 좋아하고 사랑해야 해!

그리고, 선생님과 함께 보냈던 이 순간을 기억하고

힘들고 지칠 때 마음속에서 우리가 함께 만든 좋은 추억들을 꺼내 보며 힘을 내야 해!

선생님도 너희들을 떠올리며 행복해하고 힘을 낼 거란다.

고마워, 이렇게 선생님에게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줘서."



내가 가르친 소중한 내 아이들아,

어디서 어떻게 지내니?

선생님은 지금도 아이들을 가르치며 잘 지낸단다.

내가 처음 가르친 43명의 청개구리들은 30살이 넘었을 거고, 다른 친구들도 이제 사회에서 자리를 잡았겠네. 지금은 어른이 되어 지나가도 못 알아볼 것 같아. 선생님도 많이 변했거든.

선생님은 함께 하는 시간 동안 너희를 가르치며 행복했어.

너희들에게도 선생님과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선생님과의 시간을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졌으면 좋겠어.


만나지 못해도, 소식을 알지 못해도,

선생님은 너희를 늘 응원하고 있어.

너희들이 어떤 일을 하든지, 어떤 길을 가든지, 선생님은 멀리서 너희를 응원할 거야.

사랑한다. 나의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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