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나는 교정 치료를 받았다. 그 시절엔 교정하는 아이가 드물어 ‘철갑상어’, ‘기찻길’ 같은 별명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런 별명보다 더 힘들었던 건, 집에서 두 시간이나 걸리는 치과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차멀미가 심했던 나에겐 그 길이 참 고역이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바로 엄마와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치과에 들른 뒤, 우리 동네에는 없는 대형 서점에 가서 책을 골랐다. 평소라면 엄마의 지갑은 굳게 닫혀 있지만, 책만큼은 꼭 사주셨다. 어떤 날은 햄버거를 먹었고, 대개는 작은 순대집에서 간과 내장이 가득한 순대를 포장해 집으로 돌아왔다.
한 달에 한 번씩 들르다 보니 순대집 사장님과도 인사를 주고받게 됐다.
어느 날, 나는 무심코 "우리 엄마도 화장하고 예쁘게 다녔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화장을 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났던 친구의 엄마를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사진첩에서 보았던 오래된 사진 속 엄마의 모습을 보고 그랬던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사진 속 엄마는 커다란 꽃무늬의 갈색 시폰 원피스를 입고 머리는 파마를 하고, 곱게 화장을 한 얼굴은 웃고 있었다.
나의 말을 들은 순대집 사장님은
"엄마는 너희 키우느라 바빠서 못 꾸미고 다니시는 거야."라고 하셨다.
그 말이 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지.
스무 살이 되자 나는 하이힐을 신고 캠퍼스를 걸었다. 아이라인에 마스카라까지 매일같이 화장을 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계절마다 옷을 샀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도 자신을 꾸미는 데 돈을 쓰지 않았다. "엄마도 옷 좀 사!"라고 말하면, "옷 필요 없어."라는 말이 돌아왔다. 엄마는 이미 옷 사는 법도, 화장하는 법도 잊은 사람 같았다. 그래서 어버이날이면 화장품이나 옷을 선물했다.
자식들이 모두 결혼한 뒤에야 엄마는 본인을 위해 조금씩 돈을 쓰기 시작했다. 유니클로나 지오다노에서 티셔츠와 바지 몇 벌 사서 기분이 좋다고 문자를 보내셨다. 얼마 전엔 동생이 카톡을 보냈다.
[oo씨 (=엄마 성함), 얼마 전에 뉴발 운동화 예쁜 거 신고 있더니 ㅋㅋㅋ 아빠 것도 사줬대]
엄마는 여전히 몇 년이나 가지고 있었는지 모를 립스틱 하나도 붓으로 파고 파서 사라질 때까지 쓴다. 우리가 사준 화장품은 침대 밑에 모셔두고, 시장 화장품을 사서 바른다. 그런 엄마가 백화점에서 운동화를 한 켤레 사 신은 것만으로도 내겐 큰 변화처럼 느껴진다.
순대집 사장님의 말이 여전히 떠오르는 건, 엄마가 지금까지도 자신에게 돈을 잘 쓰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적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면, 옷에 김치 양념이 묻어 있고,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었으며, 표정엔 고단함이 묻어 있었다. 그 고단함을 씻겨 주는 건 자식들의 행복한 표정이었으리라.
아이들을 낳고 난 뒤, 나 역시 분유와 이유식이 묻은 티셔츠를 입고 대충 묶은 머리로 하루를 보냈다. 20대에는 화장과 옷차림이 나를 즐겁게 했지만, 그때는 아이들에게 예쁜 옷을 입히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런 나를 보고 엄마가 말했다.
“옷 좀 사 입어, 속옷도 새로 사 입고.”
그건 내가 엄마에게 했던 말이었다.
지금은 가볍게 눈썹을 그리고, 립글로스를 바른다. 옷도 최대한 깔끔하게 입으려고 한다. 그렇게 하면 기분이 조금은 괜찮아진다. 아직, 백화점에 가면 내 옷보다는 남편과 아이들 옷을 사게 되기는 하지만. 지금의 내 나이 때, 엄마가 예쁜 옷보다 삶의 고단함을 입었기에 지금의 나는 예쁜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일까.
이제 나는 그때의 엄마 마음을 더 잘 안다. 나보다 자식을 먼저 생각하는 그 마음을. 다만, 나는 엄마처럼 살진 못할 것 같다. 아직 인터넷 쇼핑몰엔 예쁜 옷이 너무 많고, 인생에서 내가 가장 젊은 날은 오늘이니까. 엄마의 젊은 날로 우리를 키워준 것에 감사하며, 이번 엄마 생신 때는 함께 마사지를 받으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