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준비하며
일을 하면서 매일 사용하는 물건들이 있다. 분야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줄자이다. 내게 익숙한 툴을 사용할 때면 마치 그 도구를 가장 잘 사용하는 마스터가 내 곁에서 지켜 봐 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일을 할 때, 특히 정확히 빨리 해야 될 때면 익숙한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곤 한다.
줄자는 시작점과 마침점 사이의 치수를 재어주는 막대자의 역할뿐만 아니라, 3차원 공간을 가로지르며 출발점에서 -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온 걸음의 개수도 카운트해 준다.
끝 부분에 이름을 쓰고, 작은 캔들홀더에 줄자를 말아 넣어 책상 위에 보관한다. 혹시나 누군가가 빌려 달라고 할 때를 대비해, 책상 서랍에는 사용하지 않는 줄자를 따로 준비해 둔다. 빌려간 사람들은 한결같이 ‘금방 가져다주겠다’라는 말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늘 사용해서 손에 익숙해진 줄자가 나와 떨어진 다른 공간에서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사용되어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물건을 만들어 손님에게 전달해야 되는 일을 했을 때는, 받은 스케치와 택팩(Tech Pack)에 적혀 있는 숫자들에 모든 치수들을 맞추어야 했고, 내가 디자인을 하거나 바잉 한 물건을 받아보는 역할을 했을 때는, 우리가 정해 준 숫자와 그 허용치 안에서 만들어졌는지 확인해 보아야 했다. 나에게 있어서 줄자는, 내가 약속을 지키거나 또는 상대방이 잘 지키고 있는지를 계속해서 확인하면서, 함께 일 하는 것을 중단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해서 이어나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툴 이기도 했다.
코스튬 디자이너 J 선생님께 받았던 첫 번째 선물은 줄자였다. 집과 작업실을 함께 사용하던 그곳에는 앤틱 물건들과 액자들로 가득했다. 그 물건들 중에서 내가 꼭 사겠다고 생각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선생님의 작업상자 안에 있었던 독특한 모양의 줄자였다. 흰색, 노란색 아니면 분홍색과 같이 바탕 색상만 다른 "나는 줄자예요." 만을 봐 왔던 내게, 피노키오 모양을 하고 코를 잡아당기면 눈금자가 나오는 그 줄자는 신기할 정도였다. 일을 시작했던 첫날 낯가림이 심했던 내가 처음으로 "와! 이쁘다!" 라고 감정표현을 했던 것을 기억하시고,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던 날 선생님은 따뜻한 문장이 담긴 예쁜 카드와 함께 ‘그 줄자’를 선물로 주셨다.
오늘은 성탄절을 하루 앞두고 있는 크리스마스 이브이다. 나의 작업상자 안에 있는 피노키오 줄자의 코를 당겨보니, 문득 올해 했던 거짓말이나 나쁜 말들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고 보니 이 줄자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게도 꼭 필요한 툴 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하긴 하다. 기억을 읽어낼 수 있는 스캐너가 내장되어 있는 피노키오 줄자는 꼭꼭 숨겨둔 하얀 거짓말까지 꼼꼼하게 찾아내어 일렬로 세운 후, 올해의 거짓말 길이는 토털 몇 센티미터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결과에 따라서 선물은 고사하고 거짓말을 한 벌로 코가 길어질지도 모른다.
일을 하는 동안 나는 물건을 리뷰하고 숫자들을 체크하고 자로 재었다. 한 해를 마무리해야 되는 지금은 물건이나 남이 아닌, ‘나’를 재어 보아야 하는 시간이란 생각이 든다. 그동안 던져두었던 나에 대해 질문을 해 보고 스케치하고 치수를 잰 후, 나에 대한 택팩을 업데이트 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그 외에도 자로 재어 기록해 두어야 할 것들은 많다. 작은 것에도 감사한 마음 가지기, 자연이 주는 선물을 아끼고 고마워하기, 행복한 생각과 긍정적인 마음, 말하기보다 듣기, 몸과 마음의 건강 챙기기, 그리고 내년 일 년 동안 계획한 일들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기 등이다.
나를 이해해 주는 가까운 사람들이기에 오히려 멀리 두었던 그들과의 거리의 치수는 줄여야겠다. 자주 연락하고 나의 마음을 표현하는지, 함께 한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축하해 주어야 하는 때를 잊지 않고 잘 챙겨 주는지, 그리고 이러한 행동들이 형식적인 것이 아닌 나의 기쁨에서 시작될 수 있도록 일과 생활의 균형을 잘 잡고 있는지도 꼼꼼히 챙기면서 이 치수들은 앞으로 늘여나가야겠다.
내년 이맘때 즈음 일 년간 모아 온 나의 치수들을 가지고,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된 피노키오 줄자를 손에 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만나는 상상을 해 본다. 조금씩 나은 사람이 되기를 노력하다 보면 길어지는 코 대신 언젠가 정말 이쁜 코를 선물로 받게 될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은 코가 참 예뻐질 그날을 소망해 보는 것으로 그 이상의 욕심은 내려놓아 본다.
main image : The Duchess of Marlborough by Paul César Helleu 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