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받아쓰기 08 ] 듣기
갤러리에서 일을 하면서 배웠던 많은 것들 중에는 '눈치'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작품들을 태어나게 해 준 그들의 부모님들과의 첫 만남에서는 이야기하는 법보다는 '듣는 법'이 필요합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열심히 듣고 있다가 어느 곳에서 어떤 색을 가진 질문을 하고, 리엑션은 어떤 방식으로, 얼마만큼의 크기로 전달해야 상대가 편안히 그리고 기쁘게 자신과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오늘 포스팅을 위해서 하얀 모니터에 검은색 커서가 깜빡 거리는 것을 보고 있다 보니 그때 뵈었던 아티스트 한분이 떠 올랐습니다. 갤러리 대표님과 잘 알고 지내시는 분이셨고 자주 뵐 수 있었기에 익숙한 얼굴입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다 은퇴하시고 프랑스 작은 시골마을과 미국에 있는 작업실에서 작품 생활만 하고 계셨습니다. 방문을 하실 때면, 늘 잘 다려진 하얀 셔츠와 무채색의 바지를 입으셨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이분과 대화를 할 때는 리액션이 크지 않으면 이야기는 계속 길어져, 제가 가지고 있는 가장 풍성한 표정과 목소리로 질문은 딱 한번 정도 하는 것으로 규칙을 정해 놓았습니다.
저는 그분의 드로잉들이 좋았습니다. 그려진 라인 하나에도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 같은. 저런 선 하나를 그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삶이 녹아들어 가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습니다. 제 생각을 말씀드렸던 이후부터, 기분이 좋으시면 가까이 보이는 종이에 간단한 그림을 그려주시곤 하셨습니다.
한 번은 갤러리 식구들이 초대를 받아 작업실 구경을 갔었는데, 한쪽 벽을 덮고 있는 그림에는 수많은 배(boat)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꽤 예전에 그림을 시작을 하셨는데, 다른 그림들과 별도로 생각날 때마다 그리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언제나 완성이 될지도 모르는 그림, 일기장과 같은 그림.
내게도 열쇠를 달아두지 않고도 감정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반복해도 싫증 나지 않을 만큼 매력적인 어떤 것. 하지만 충분히 나와 같아서 오랫동안 함께해도 가볍고 편안한 것. 유려한 선을 하고 있지 않아도, 많은 디테일 없이도 그날의 이야기를 기억할 수 있는 것.
몇 가지 떠오르는 것들은 있는데 결정을 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 대상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만 볼 수 있나 봅니다. 그렇다면 눈을 감고 내게 물어봐야겠습니다. 오늘 답변을 듣지 못하더라도 배워 두었던 '듣는 법' 대로 기다려 보아야겠습니다.
오늘은 8번째 그림을 들어보는 날입니다.
오늘의 화가는 제가 찾고 있는 대상을 이미 찾아서 계속해서 그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들어보시고 스케치도 해 보시고 상상해 보시면서 오늘을 마무리하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