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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 May 31. 2022

머무르는 건 시절 마음뿐

철판이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스물 시절은 어디에 머물러 있나요? 사회성이 거진 결여되어 있다 해도 무방했던 나는 스물의 대부분을 어느 서점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아르바이트 출근 전, 퇴근 후에도 두어 시간, 학교를 다니면서도 친구와의 약속 전에도 나의 시간을 담담히도 받아 주던 곳입니다. 


 1층 입구 언제나 계신 경비원 아저씨와 가벼운 목례 후 베스트셀러 구간과 좁은 시집 구간을 차례차례 지나 아래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 마저 지나치면 그제야 가장 구석 일본 소설과 해외 연작소설 벽면 가판대 사이 나처럼 용도를 알 수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차가운 철판이 있었습니다. 손길에 멀어져 뒷방 신세인 양쪽 가판대들 소설들 덕에 철판은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닿지 않는 곳입니다. 누군가가 책을 찾기 위해 내게 비켜달란 신호를 보낼 일도 없고 허리에 통증이 심했던 나는 지하철도 서서가기 힘들었던는데요 그런 나약한 나에게 받침 없는 의자만 덩그러니 있던 곳보다 안락한 독서를 허락해준 장소입니다. 딱 내 등 너비만 한 차가운 회색 철판에 기대어 양 무릎을 바짝 세워놓고는 턱을 괸 채 핸드폰 속의 노래를 들으며 수 없이 종이를 넘겨 보냈습니다. 

 난 그곳과 물리적으로 한참이고 멀어졌지만 이따금 본가에 가는 날이면 철판을 보러 갑니다. 그리고 보답이라도 하듯 오래도록 그곳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 철판의 쓰임이란 사실 누군가에게 등을 맞대어주는 역할이 아니었나 싶은 허무맹랑한 생각이 들만큼 굳건히 그곳은 버티고 있었습니다. 난 정말이지 그곳을 사랑했습니다. 몇 시간이고 의자에 앉아 심지어 서서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건강한 허리가 되었지만 굳이 온몸을 구겨 스물 시절처럼 책을 읽어봅니다. 옛 생각이 납니다. 이곳에서 보낸 스물의 내 모습, 두고두고 들었던 생각들, 책의 구절들, 책에 정신 팔려 약속시간을 지나친 나를 부르러 오던 나의 손꼽는 그대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제 오랜만에 철판을 보러 갔습니다. 역병이 오고는 한 번도 가지 못했네요. 드문드문 본가에 갔지만 자영업을 하시는 아버지에게 피해를 끼치기 싫어 정말 집안에만 박혀있었거든요. 설렜습니다. 5월 끄트머리 철판은 또 어떤 이의 등을 맞대어 주고 있을까. 커다란 서점 속에서 자신이 맡은 조그마한 역할을 그날도 담담히 맡아오고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건 없나 봅니다. 가판대 옆에 즐비했던 불편한 의자들 조차 다 사라졌고 이젠 앉아서 책을 읽는 것이 당연했던 공간들은 앉아서 책을 볼 공간 따윈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내가 알던 경비원 아저씨도, 직원분들도 당연했던 가판대들의 위치도 모두 변해버렸습니다. 그곳은 분명 내가 아는 장소인데 말이죠. 당연히 내가 사랑했던 철판은 또 다른 가판대로 바뀌어 책들이 빈틈없이 꽂혀있었습니다. 철판은 자기 할 일을 다 했나 봅니다. 


 결국 또 내가 사랑했던 어떠한 그것은 그때 그 시절 마음에만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시절 속에만 머무르는 것들이 쌓이는 것이 하나 둘 늘어나는 걸 보니 나이란 걸 먹고 있기는 한 가 봅니다. 아직은 시절 속에 머무르고 있는 그것들이 몇 되지 않아 익숙함보다 그리움이 큽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내가 기억하고 있을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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