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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쓰지 말자 Oct 24. 2021

비 오는 날의 추억

오랜만에 비가 왔다. 그것도 봄비다. 올해는 코로나 영향으로 봄이 왔는지도 모르고 지내던터라 봄비라고 부르기도 어색하다. 비가 오는 날은 왠지 모르게 설렌다. 어릴적부터 감수성이 남달랐던 탓에 비 오는 날에는 일부러 클래식 음악을 듣거나 그 시절 인기였던 신승훈의 발라드 테이프를 들었다. 음악을 들으며 알지도 못하는 가사를 흥얼거리고 넋을 놨던 기억이 난다. 그 날은 왠지 공부도 잘 되는 것 같고, 비 오는 날은 시간이 흐르는 게 아까웠다. 적당한 양의 비뿐 아니라 며칠간 이어진 폭우나 장마도 좋아했다. 장마철은 내게 가장 설레는 시기 중 한 때였다. 중랑천에 물이 범람해도 뉴스에서 폭우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물을 퍼날르고 해도, 비 오는 날을 이상하리만치 좋아했던 것 같다.


비가 오는 날은 그 어스름한 하늘과, 여러 물체에 닿는 빗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대기에 젖어 드는 게 좋았다. 비 오는 날의 선들거리는 찬 공기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한 순간도 비 오는날을 싫어한 적이 없던 거 같다. 비 오는 날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의 축축함과 양말이 젖었을 때의 찝찝함도 비 오는 날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어린이집을 보내면서, 비 오는 날이 마냥 설레지만은 않다. 평일에 아이들의 등하원 시간에 비가 오면 그 때는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 이모님께 계속 카톡을 보내며 당부할 것들을 전하고, 죄인이 된 마냥 죄송하다는 말과 부탁드린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 비가 너무 많이 오면 택시를 타시라는 말들을 남기게 된다. 다행히 오늘은 아이들의 등하원 시간엔 비가 많이 오지 않아 등하원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그럴땐 한숨을 돌리고 언제 걱정했냐는 듯 내 일을 본다.


얼마전, 오늘처럼 비가 오던 날 50대의 여자 선배, 우리 회사에 유일한 생존한 여자 선배 저녁을 먹었다. 오랜만의 저녁 외출인데다 창가에 부딪힌 비와 자동차들의 불빛, 네온사인들이 어우러진 밤풍경이 좋았다. “전 이렇게 비오는 날이 좋아요. 뭔가 마음이 촉촉해져요”라고 하자 선배는 “그래?” 라며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난 비오는 날은 가슴이 답답해지고, 트라우마가 있어” 그 뒤에 이어진 말에 한동안 멍 해졌다. 일기예보가 틀리는 게 너무 짜증이 나고 싫었다는 것이다. 비가 안 올거라는 예보에 우산을 안 챙겨 보냈는데, 비가 오면 애들 걱정에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비 오는 날만 되면 그때의 그 답답함이 밀려온단다.

초등학교 시절, 비 오는 날은 엄마가 학교에 오는 날이었다.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 신발 갈아 신는 것이 세 곳으로 나뉘었던 학교 1층, 엇갈려 비를 맞고 돌아올 때도 있었지만, 비 오는 날은 거의 엄마가 우산을 들고 찾아왔다. 엄마랑 우산을 같이 쓰고, 집에 오는 날이 좋았다. 신났다. 혹 엄마랑 길이 엇갈린 날은 괜히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그 기억이 지금도 너무 좋다.

그런데 벌써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조여온다. 우리 아이들에게 남겨줄 수 없는 추억이라는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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