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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Jul 15. 2023

나는 왜 그 책을 사랑하는가

<고요한 포옹>, 박연준

책에 관한 허기 안고 산다.

성질이 다른 것이긴 하지만 욕보다 책욕이 월등히 강하다. 배가 고플 때 뭔가 먹으면 금세 포만감에 이르지만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더 읽고 싶어질 뿐이다. 외출할 때 가방 속에, 여행 갈 때 캐리어 속에 책이 한 권 이상 있어야 안심이 된다. 이도저도 안 되는 상황에는 전자책, 혹은 오디오북이라도 들어야 하기에 이어폰 또한 필수 휴대품이다.


휴직자의 특권으로 거의 매일 도서관에 간다. 서가를 돌며 책을 고른 뒤, 옆에 쌓아놓고 시간이 허락하는 동안 그곳에 앉아서 읽는다. 가장 좋아하는 장소에서 보내는 가장 행복한 시간 중 하나이다. 백화점 같은 곳에서 매장을 돌며 물건을 고르고 피팅하는 일도 이와 비슷한 구석이 있지만, 쉽게 피로감이 찾아온다는 차이가 있다. 아무래도 도서관에서 나는 정신적으로 가장 왕성해진다.(물론 피곤할 때 책 읽다가 졸 때도 있다. 그 쪽잠 또한 얼마나 달콤한지.)

 


도서관에서는 주로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전작주의로 정독하거나, 신간을 훑어본다. 읽던 책에서 언급된 다른 저자의 책으로 확장하기도 하고, 예전에 읽었던 책을 반가운 마음에 꺼내서 다시 읽기도 한다. 서모임에서 함께 읽는 책도 병행한다. 병렬독서라는 방식으로 이 책 저책을 게걸스럽게 읽어댄다.



귀가 시간이 임박하면 읽던 책 중 몇 권을 대출한다. 대출권수 제한으로 두고 가야 하는 책자꾸자꾸 눈에 밟힌다. '내일 다시 와서 널 읽을게. 제발 내일까지 다른 사람 눈에 띄지 말..'  간절한 마음이다.



집에서도 책을 계속 읽을 수 있는 여유는 아직 내게 없다.

주로 돌봄을 끝낸 늦은 밤시각, 안락의자에 앉아서 낮에 가져온 책을 펼쳐본다. 그 고요한 충족감이란. 특히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받아 들고 첫 장을 펼치는 건, 정말이지 순수한 설렘과 기쁨의 순간이다.



박연준 작가의 <고요한 포옹>


내가 희망도서로 신청한 책을 내가 첫 번째로 대출하는 영광을 또 누렸다.(희망도서를 신청할 때 연락처를 기입해 두면 문자로 연락이 오고, 첫 번째 대출자가 될 수 있다. 도서관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누군가가 몹시 좋아하는 것과 극히 싫어하는 것에 대해 연구하다 보면 그 사람에 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좋든 싫든 내 안에서 강렬한 감정이 올라올 때, 그것을 애써 들여다보는 편이다. 나는 늘 나와 더 친해지고 싶기 때문이다. 내 속엔 여전히 내가 모르는 부분이 존재한다. 세포가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듯, 나를 구성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 또한 사라지고 변화하고 새로이 생산된다. 그걸 간파하는 일은 꽤 의미 있고도 즐겁다. 나를 더 잘 안다는 건 내가 원하는 걸 알아간다는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자신을 잃지 않 때문이다. 어쩌면 책은 내가 나에 관해 알아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매개체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읽고 있는 다른 소설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책들은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는 책이 아니라 이미 마음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들을 아름다운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들이었다.

<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이 문장은 내가 박연준 시인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를 적확하게 담고 있다. 인의 시선은 다양한 방식으로 아름답다. 은유적이고, 하고, 비밀스럽게 일렁이고, 랑콜리하고, 근사하다. 그가 내면의 말을 기술하는 방식을 나는 속절없이 사랑한다. 나는 적 상상력은 전혀 없는 사람인데 이유 없이 시에 이끌린다. 아름다운 문장과 마주할 때, 아름다운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을 볼 때면 숨이 멎을 것만 같다.


그의 글에는 수용하고 포용하는 마음 은하게 깔려있다. 쫓기지 않는 마음, 타자를 다치게 할까 봐 고요하게 끌어안는 조심스러움이 있다. 그런 문장에 감응하는 나를 발견하며 내가 추구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구체화해 본다. 더불어 내 안에 사랑과 너그러운 마음 궤적을 더욱 넓히기를 바라본다.


가장 중요한 점. 무엇보다 박연준 작가의 글은 나로 하여금 쓰고 싶은 마음이 치밀어 오르게 만든다. 그의 앞선 책 <쓰는 기분>에서도 그랬듯, 내 속에 뭔가를 건드려 뭔가 말하고 싶게 만든다. 그걸 글로 쓸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이다. '누군가보다 더 잘 쓰거나 더 못 쓸 의향 없이, 딱 나만큼 쓸 수 있는 용기' 말이다.






이 책에는 수많은 금이 들어 있다. 금 간 영혼을 수선하느라 골똘히 애쓴 시간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 '되고 싶은 나'와 '되기 쉬운 나' 사이에서 괴로워하다 금을 간직한 내가 되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이제 나는 열정적 포개짐보다 고요한 포옹이 좋다. 당신이 간직한 금이 혹시 나로 인해 부서지지 않도록 가만가만 다가서는 포옹이 좋다. 등과 등에 서로의 손바닥이 닿을 때, 가벼운 포개짐이 좋다. 고양이처럼 코끝으로 인사하며 시작하고 싶다. 끔찍하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금 간 것을 계속 살피고 보호하려는 마음을 키우고 싶다. 어렵더라도.

P.10


이런 아침을 알고 있다. 뜯긴 적 없는 시간을 봉지째 받아 든 사람처럼 깨어난 아침. 창문을 열어 그날의 햇빛을 느끼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시작하는 아침. 화분에 물을 주며 "무럭무럭 자라라” 하고 주문을 걸며 시작하는 아침. 콧노래를 부르며 갓 구운 빵을 사러 가는 아침, 알긴 아는데 좀 오래되었다. 이런 아침을 맞이한 게 언제였더라? 우리는 이런 아침을 어느 순간부터 잃고, 잊고, 놓치게 된다. 수없이 잃어버리고 되찾기를 반복하다 결국 이런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며 늙는다.
 
P.66


그러니까 우울은 슬픔을 두드려 얇게 펼친 것, 엷은 분노, 슬픔보다 진하진 않지만 광활하고 끝을 알 수 없는 무엇이겠지요. 누가 슬픔보다 우울을 가볍다 할 수 있겠어요? 바닷물에서만 사람이 죽는 건 아니지요. 사람은 강물, 냇물, 접시 물에서도 익사할 수 있습니다. 펼쳐진 슬픔, 얕은 깊이를 존중하고 들여다보아야 하는 까닭이지요.

P.74


만개하기 전 꽃망울이 맺힌 벚나무를 열 걸음 떨어져서 본 적 있는가? 그때 벚나무는 간질간질, 분홍 재채기를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저기서 벚나무들이 본격적으로 재채기를 하기 시작한다면! 분홍을 밀어낸 흰빛이 화사하게 터져 나올 게다. 만개한 벚꽃은 너무 화사해서 오히려 사람을 슬프게 만든다. 떨어질 일을 염두에 두어서일까. 가장 좋은 것, 그다음은 쓸쓸함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사랑의 절정엔 살림이 없어." 선배는 말했다. 나는 꽃이 진 나무의 그다음, 지난한 살림을 생각한다. 잎이 나고 열매를 맺고 잎을 떨군 뒤, 영광이 사라진 자태를 그려본다. 꽃나무 앞에서 한숨을 쉬던 어른들의 마음, 벚꽃 한창일 때 세상을 떠난 할머니의 작은 등이 떠오른다.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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