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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Jul 26. 2023

신규교사는 시달렸다

십여 년 전, 나를 포함한 신규교사 여럿이 같은 학교에 발령받았다. 우리는 모두 20대 미혼 여성이었고, 타시도 출신이었으므로 근처에 가족이 없었다. 2월 말, 신규 임용교사 연수가 끝남과 동시에 발령을 받은 우리에게 당장 살 집을 구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나는 근처의 오래된 월세아파트를 계약해 동료와 셰어 하기로 했다. 다른 이들은 학교 앞 원룸을 구했고, 나머지 한 명은 하숙집을 구해서 살았다.

퇴근 후, 우리는 늦은 저녁을 함께 먹을 겸 모였다. 당시 방과 후학교가 대규모로 운영되던 학교라 퇴근시각은 밤 8시를 훌쩍 넘기곤 했다. 평균 수업 시수 22-24에 방과후 수업까지 더하면 주당 35시간 남짓. 매일 7개 이상의 수업을 하고, 틈틈이 교실을 들여다보는 담임업무를 했으며, 당연히 행정업무도 맡았다. 일과2, 방과후기획, 교무기획2, 과학부기획, 평가기획 등이 우리의 첫 업무였던 걸로 기억한다.

학교에서의 매일은 다채로운 방식으로 고된 나날이었다.
업무에 관해서는 어느 시기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에 관한 감각이 (당연히) 없었다. 감사하게도 내가 속한 부서의 부장선생님은 기안 올리는 방법부터 세세히 지도해 주셨는데, 교무실에는 다른 부서 부장선생님이 나의 부장님을 동정하듯 놀리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 많은데, 신규까지 와서 김 부장이 고생이 많네..” 하는 우스갯말이 오갈 때면 나는 남에게 폐 끼치는 비루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나쁜 의도가 전혀 없어 보이는 농담에도 누군가는 다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모르는 걸 물어보려다가도 선배교사들을 귀찮게 할까 봐 최후의 순간까지 혼자 고민하느라 불필요한 에너지를 많이 썼던 기억이다.

담임을 맡았기에 정기적, 비정기적으로 학부모 상담을 했고, 매번 녹록지 않았다. “선생님이 아직 애를 안 키워보셔서 잘 모르시겠지만..”라는 말은 처음 들었을 때 크게 당황했지만 자주 듣다 보니 식상해질 정도였다. 교실에서 아이들끼리 다툼이 있을 땐 특히 어려웠다. 문제 상황을 중재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우리 애가 그럴 애가 아니에요.”, “우리 애 말은 좀 다르던데요.” 도 흔한 말이었지만, “애 아빠 웬만해선 화 안내는 사람인데 이번엔 화 많이 났어요.”라는 말에는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멍해졌다.

교실에서 아이들을 마주하는 일은 예측불가였기에 나는 대체로 긴장상태였다. 한 번은 저희들끼리 비속어가 오가는 걸 지적했더니 “한테 한 거 아닌데요, 그리고 그거 욕 아닌데요?” 하고 대들었다. 그 아이는 얼마 뒤 자신의 담임선생님(나의 신규동기교사)의 면전에 쌍욕을 내뱉었다. 생활지도의 일환으로 화장품을 압수하자 흥분해서는 “야이 씨*년아!”라고 소리를 질렀단다. 그 일을 우리에게 털어놓던 동료의 떨리는 목소리를 아직도 기억한다.

막돼먹은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도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힘듦이 있다는 걸 안다. 어느 날은 밤 9시에 근처 대형마트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반 아이들이 그곳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적발되었는데, 보호자 연락처에 내 번호를 댄 것이었다. 급히 달려가보니, 아이들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제발 부모님께만 알리지 말아 달라고 내게 호소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은 소수였다. 선생님에게 우호적이고 예의 바른 학생들이 더 많았고, 교사로서 보람찬 순간들도 있었다. 그렇게 5년 만기를 채울 생각이 있었지만, 3년 차에 생긴 일로 나는 내신을 쓰고 그 학교를 떠났다.

당사자인 나는 그 일이 일어난 걸 한참 후에 알았다. 3학년 남학생 교실에서 수업을 하던 중 한 학생이 디지털카메라로 내 치마 속을 촬영했고, 그 적나라한 사진을 여럿이서 공유한 일이 며칠 뒤 누군가의 신고로 드러난 것이다. 사건 당일 나는 무릎 아래 길이의 플레어 치마를 입고 있었고, 개별 학습을 도와주느라 한 아이의 책상 옆에 서서 뭔가 설명을 해주던 중이었다. 뒤쪽에서 누군가 발밑으로 카메라를 들이밀어 소리 없이 신속하게 사진을 찍었고, 나는 그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며칠 뒤 우리 반의 어떤 학생이 나에게 그 일을 귀띔해 주었을 때 나는 심장이 굳는 것 같았다. 두 손이 마구 떨렸다. 극도의 충격으로 인해 정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학생부에 찾아가서 학생부장샘께 알렸고 이윽고 교감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내 앞에 앉은 그는 인상을 쓰며 "아이고 그 노무 시키들, " 하는 말로 시작했다.
 "아~들이 젊고 예쁜 여선생님 보고 정신을 못 차리고 마... 그 나이 때 머스마들이 호기심이 왕성하다 아인교, "  
이상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당황했다. 아마도 나는 ‘샘이 마음이 힘들었겠어요.’ 식의 맥락을 기대했던 것 같다.  
. "그러니까 여쌤들이 치마 입을 때는 특히 조심해야 됩니더, 아니, 아예 치마를 안 입어야 돼~,"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는 나에게 '그 애들을 어떻게 해줬으면 하냐'라고, '애들이 징계받기를 바라느냐'라고 물었다.

그런 일에 대한 매뉴얼 같은 건 몰랐다. 신규연수 때 그런 것은 듣지 못했다. 교감선생님이 말하는 아이들에 대한 징계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그 또한 잘 알지 못했다. 급기야 ‘내가 뭔가 잘못한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사람이 아이들로 하여금 징계라는 난처한 일을 겪게 하는 것인가 싶어 혼란스러웠다. 처음에는 분명 화가 났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슬퍼졌다. 나는 자책했다. 아이들이 벌을 받길 바라는지 아닌지조차 모르겠는 지경이었다. 학교 관리자들은 최대한 조용하고 신속하게 이 일을 수습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확실한 건, 그 상황이 죽도록 수치스러웠다는 것과 그 아이들과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심정이었다.

그 사건에 연루된 학생들은 생활지도를 담당하던 남자교사에게 매를 맞았다. 엎드려뻗쳐서 엉덩이를 몇 차례 맞았다고 들었다. 그 일은 그렇게 끝났다. 나는 무력했다. 남은 학기 동안 나는 그 반의 수업을 그대로 들어가야 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학교에 갈 생각에, 그 교실에 들어갈 생각에 몹시 괴로웠다. 그 교실에서는 다른 반에서처럼 자연스럽게 수업하기가 힘들었다. 어서 빨리 그 해가 끝나기만을 기다렸고, 이듬해 학교를 옮겼다.


시간이 흐른 덕분에 그 시절을 꽤 담담하게 회상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씁쓸한 기억이다. 당시 내 옆에 있었던 동기교사들이 큰 위로가 되어 준 것이 고마운 한편, 고민을 털어놓고 도움을 구할 교내의 선배교사나 교육공동체가 부재했다는 것이 아쉽다.

교사라는 일은 다른 직업에 비해 사회윤리적 기대치가 높기에, 우리가 감내해야 할 영역의 범위 넓다. 교사가 존엄(과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개선되어야 할 제도와 인식 관심을 갖고, 우리는 그것에 관해 끊임없이 이야기 나누어야 할 것이다. 학교라는 공간이 누군가에게 지옥이 되지 않길 바란다. 아무쪼록 우리 곁에 서로 돕고 고통을 나누며 연대할 누군가가 꼭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 글에는 성인지감수성을 다룬 저의 예전 글 <우리는 좀 더 예민해져도 된다>의 에피소드를 재인용하였습니다.


근무하던 학교에서 생을 마감한 젊은 동료 교사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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