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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Aug 26. 2023

여름은 어김없이

개학, 첫 수업

아직 여름이지만 여름방학은 끝났다.

학교에 복직한 나는 출근을 한다. 우리 집의 아침 풍경은 꽤 일사불란하다. 나는 6시 40분에 기상하여 곧장 주방으로 간다. 냉장고에서 사과, 당근, 양배추, 요거트를 꺼내 블렌더에 넣고 주스를 만든다. 우리 부부의 아침식사이다. 블렌더의 요란한 소음에 깬 남편이 부랴부랴 아이들의 아침식사를 준비하, 그동안 나는 씻고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앉아 출근 준비를 한다.



아직 잠이 덜 깬 어린이들 깨워 식탁에 불러 앉힌다. 아이들이 자기 앞에 놓인 곰국, 밥, 달걀프라이 따위를 깨작거리는 동안 나는 소녀들의 머리카락을 다. 둘째가 선호하는 - 중간 가르마를 타서 양옆으로 묶은 뒤 땋아내리는 - 스타일은 주말에만 하는 걸로 합의했다. 촘촘한 빗으로 둘째의 머리를 포니테일로 완성하고, 옆에 앉은 첫째의 뒤로 자리를 옮겨 자매의 머리를 같이 평범하게 든다.



7살 둘째는 제 아빠가 출근길에 유치원에 데려다준다. 그렇게 아이는 매일 아침 8시에 가장 일찍 유치원에 도착하는 원아가 되었다. 8살 첫째 아직 방학중이라 9시까지 학교 돌봄 교실로 등교한다. 돌봄 교실은 맞벌이하는 부모를 둔 1학년 학생들을 돌봐주는 감사한 공간이다. 아빠, 엄마, 동생이 8시에 집을 떠난 뒤 우리 집 장녀는 혼자서 집에 40분가량 머무르다가 학교에 간다. 자신의 휴대폰으로 알람을 설정해 놓고 시간 맞춰 집을 나서는 이 1학년 학생이 기특해서 나는 마음이 시큰거린다.



차로 5을 달려 학교에 도착한다. 출근 후  먼저 하는 일은 커피 내리기다. 교무실로 들어가 내 책상 위 컴퓨터 전원을 켜고, 탕비실로 직행한다. 그라인더에 원두를 넣어 작동시킨 뒤 원두가 갈리는 동안 포트에 물을 올린다. 전날 씻어 말려 둔 서버와 드리퍼를 꺼내고, 그 위에 여과지를 한 장 세팅한다. 그라인더의 작동이 멈추면 투입구를 열어서 갈린 원두가루를 여과지에 붓는다. 그 순간 퍼져나가는 진한 커피 향을 사랑한다. 어지러울 만큼. 나는 포트를 살짝 기울여 물줄기를 돌려가며 커피를 적신다. 달콤 쌉쌀한 커피 향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하루 중 가장 감미로운 시간이다.



아침시간의 이런 여유는 올해 담임이 아니기에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담임교사는 매일 아침 교실에 들어가야 하므로 상대적으로 분주하다. 비담임인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1교시 수업을 준비한다. 종이 울리, 1학년 교실에 들어간다.



같은 공간이지만, 그곳을 채우는 구성원들은 매년 갱신된다.

남학교이던 학교는 올해부터 남녀공학으로 전환되었다. 여학생들이 앉아있는 교실이 발랄하게 생경하다. 모두 17살지만 저마다 들쑥날쑥한 년 소녀들. 그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본다. 나는 내적으로 숨어버리고 싶지만, 직업적 정체성을 애써 상기하고는 미소를 지어본다. 첫 시간을 위해 준비한 활동이름표 만들기와 자기소개이다. 자기소개는 이름,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그리고 근황 2가지를 말하것이라고 설명해 준 뒤에 내가 먼저 샘플을 보여준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000입니다. infp이고요.
저는 도서관에 가는 것을 좋아해요. 요가, 수영, 달리기도 좋아하고요. 일대일 대화를 무척 좋아하고,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싫어하는 건 닭발, 곱창, 육회.. 못 먹는 데 그런 거 자꾸 먹어보라고 권하는 사람, 그리고 파충류, 조류, 양서류.. 조금 무서워해요. 그리고.. 6인 이상 모이는 자리에 참석하는 것, 욕하는 것, 너무 철저히 계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근황은, 지난 주말에 오펜하이머를 봤는데 보다가 조금 졸았고요ㅋ, 요즘 아침마다 건강주스를 마시고 있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눈을 반짝거리며 듣고 있던 아이들이 열렬히 박수를 보내준다. 정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 덕분에 어색함이 사르르 아내린다.


- 이제 너희들 차례야.

내 말에 아이들은 들뜨고 긴장한 얼굴이 된다.


명 한 명 교실 앞으로 나와서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그들의 말을 경청한다.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고 특징을 메모하면서 최선을 다해 낯선 이름을 외워본다. 서 빨리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아이들은 친구가 교실 앞에서 쭈뼛거리며 자기 이름을 말하기만 해도 깔깔거리며 즐거워한다. 누군가가 주말에 영화를 봤다고, 혹은 산책을 했다고 말하자 "누구랑~~~~?!" 질문이 쏟아진다. 부끄러워하고, 웃기고, 놀리고, 감탄하 자기소개가 끝날 때마다 우리는 큰 박수로 화답해 주었다.  이렇게 8 학급과 기애애한 8시간을 보냈다.



A는 산책하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명령하는 것을 싫어한다.

B는 고양이를 좋아하고, 벌레와 가지를 싫어한다.

C는 방학 동안 10시간씩 잠을 잤고

D는 2학기에 머리카락을 길러보려고 한다.

E는 자기 자신을 꽤 좋아하고, 수학을 싫어한다.

F는 거짓말하는 사람을 싫어하고, 요리하는 걸 좋아한다.

G는 남자친구와 커플팔찌를 새로 맞췄고

H는 이번학기부터 학원을 끊고 혼자 공부해보려고 한다.

I는 방학 동안 물놀이를 자주 해서 피부가 너무 탔다.

J는 아침부터 배가 아팠는데 지금도 아파서 '혹시 지금 화장실 좀 갔다 와도 될까요?'라고 했다.

K는 방학 동안 쌍꺼풀 수술을 해서 아직 눈이 조금 부어있다.

L은 축구를 좋아하고, 리버풀 팬이다.

M은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고, 강아지 똥 치우는 걸 싫어한다.

N은 야구 보는 것을 좋아하고, 롯데가 가을 야구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O는 주말에 교보문고에 가서 도스토예프스키 책을 샀다.

P는 밖에 나가는 걸 싫어하는 집순이이고

Q는 집에 있으면 답답해서 싫다.

R은 노래방에서 춤추는 걸 좋아하고 버섯을 싫어한다.

S는 현재 3명과 썸을 타고 있다.

T는 오늘 아침에 버스를 타고 학교에 왔고, 발뒤꿈치가 까졌다.

U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보고 펑펑 울었다.

V는 방학 때 서울에 갔다 왔고, 지금 너무 집에 가고 싶

W는 선생님과 MBTI가 똑같아서 너무 신기하고 반갑

X는 어제 3시간밖에 못 자서 많이 졸린다. 

Z는 싫어하는 것이 딱히 없다고 한다.



앞으로 몇 달간 나는 이 아이들에 관해서 또 어떤 것을 알게 될까. 교실에서 주기적으로 만나는 이 인연이 새삼 귀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선생님을 곧잘 믿는다. 내가 원하든 원치않든 교사란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17살이었을 때 선생님들을 떠올려본다. 그들의 존재 아득히 무거웠지만, 때때로 한줄기 빛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좋은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아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는, 책의 한 구절을 읽어주었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편안함과 불편함을 느끼는지 감각을 예민하게 깨워보자고 말해주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관해 가열하게 토론도 해보자고 했다. 지치고 힘들 때 내가 숨 쉴 구멍 하나쯤 꼭 만들어 놓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좋아하는 일을 너무 오래 유예하지 말 것도 강조했다.



출근 3일째 되는 날, 쪽 눈에 안구결석이 생겨서 또 안과에 갔다. 충혈된 눈으로 병원을 나서는데, 비가 내렸다. 빗줄기가 세차 시원했다.


이번 비가 끝나면 가을바람이 불어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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