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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Aug 09. 2023

‘책임’을 갖는다는 말

<날씨와 얼굴>, 이슬아


“책임감을 가져라.” “너의 말(행동)에 책임져라.”


유년 시절부터 빈번히 들어온 말이다. ‘책임감’을 강조하는 사회적 가르침에서 자유로웠던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 말은 교사가 학생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던지는 말에 필연적으로 등장한다. 구직자의 입사지원서에, 누군가의 자기소개서 혹은 반성문에서도 높은 확률로 사용된다. "책임감 있는 태도"라는 표현은 일상적으로 남용되어서 상투적인 말로 들리기도 한다. 고백하건대 나는 ‘책임’이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새기지 못한 채 피상적으로 사용해 온 사람이다. 이슬아 작가의 <날씨와 얼굴>을 읽으며 그 사실을 인지했다.



세상에는 외면하고 싶은 일들이 있다. 그것은 대부분 더럽거나 잔인하거나 마음이 아프거나 괴로운 일일 테다. 막힌 배수구를 뚫기 위해 거름망을 들어내고 하수구 속을 들여다보는 일이나 여름날 공용 음식물수거통의 뚜껑을 여는 일부터, 구제역에 감염된 돼지들이 대량 살처분 당하는 장면이나 가축이 축산업장에서 도살당하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남이 대신해줬으면 하는 일,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고 여겨지는 일들을 우리는 굳이 보고 싶지 않다. 자꾸만 마음이 불편해져서 외면하고 싶어 진다.



우리가 이런 찜찜한 감정을 갖는 것은 어쩌면 그 일에 일말의 책임을 느낀다는 것일까? 이렇게 말하면, ‘내가 만든 음식물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건 응당 내 몫이지만, 전염병 걸린 가축은 모두의 안전을 위해 당연히 살처분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혹은 ‘소, 돼지, 닭은 인간에게 필수적인 동물성 단백질 공급원이므로 도축과정은 필수 아닌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장식 축산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에는 돈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소비했던 고기를 서민들도 부담 없이 사 먹을 수 있는 시대이다. 그것에 기여한 것이 바로 공장식 축산이다. 요즘 태어난 대부분의 소는 더 이상 들판에서 풀을 뜯으며 자라지 못한다. 열악한 사육장에 감금당한 채 성장촉진제와 항생제를 끊임없이 맞으며 금세 자라서 고기가 된다. 돼지와 닭의 삶도 다르지 않다. 밤낮없이 새끼를 낳고, 알을 생산하다가 결국 죽임 당한다. 수컷병아리는 출산이라는 기능을 못하므로 태어나자마자 그라인더에 갈리거나 질식사당한다. 닭가슴살의 높은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수많은 닭들은 가슴을 발달시키는 촉진제를 맞고 비대해지고, 만성 유방염에 시달린다.



가축 전염병과 살처분은 공장식 축산 방식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동물의 기본적인 면역력을 파괴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고기의 소비가 비약적으로 증가하였고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공급이 뒤따랐으며, 이 과정에서 거대한 부작용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사태를 겪으며 우리가 동물 복지에 관심을 갖고, 동물권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무척 고무적이다. 채식, 비건과 같은 주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우리가 모종의 ‘책임’ 의식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읽힌다.



<날씨와 얼굴>의 저자 이슬아 작가는 책임감이라는 말을 다음과 정의한다. '책임감이란 나로 인해 무언가가 변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내가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동물과 인간이 관계 맺어온 방식을 개선하고 싶다는 의지는 기후위기에 대한 입장'이라는 점도 밝힌다. 축산업 온실가스 배출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이고, 공장식 축산은 지구의 평균기온을 상승시키는 데 영향을 끼쳐왔음을 부정할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는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귀하게 대하는 이들을 빈번히 목격한다. 개를 식재료로 사용해 온 우리나라의 식문화가 전 세계로부터 야만적이라는 비난받은 사례도 있다. 동물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이처럼 깊다. 내가 어릴 적, 할머니 댁에서는 소와 개를 길렀다. 나는 동물을 그처럼 가까이에서 본 일이 없었기에 신기한 마음으로 그들을 관찰하곤 했다. 시간이 흐른 후 그 소를, 그 개를 우리가 잡아먹었다고 어른들이 말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원래 다 그런 거야, 먹는 동물은 별개인 거야.”라는 말을 들으며 온순했던 그 개와 소가, 무구했던 그들의 눈동자들이 떠올랐다. 동물에 대한 인간의 배타 사랑에 몹시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이러한 맥락을 바탕으로, 나는 고기를 먹지 않기로 결심한 적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패였다. 건강상의 이유였다. 채식이나 비건식으로 균형 잡힌 영양 상태를 유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배웠다. 고기를 먹지 않고도 건강하려면 먹는 것에 훨씬 민감해져야 하고, 끼니에 더없이 부지런해져야 하며, 식단에 관한 꾸준하고 부단한 연구와 노력을 해야 했다. 그러므로 동물권과 기후위기를 위해 당장 육식을 끊자고 나는 감히 말하지 못한다.



나는 그저 내 입에 들어가는 식재료가 어디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서 나에게 당도하는 것인지에 더욱 관심을 가져 보려 한다. 세상에 유통되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수요가 있기에 공급이 존재한다. 고기 또한 그러하다. 혹시 내가 필요 이상으로 육류를 섭취하고 있지는 않은가? 관심을 가지면 알게 되고, 알고 나면 이해할 수 있으며, 이해가 성립하면 공감할 수 있다. 우리가 섭취하는 동물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나의 즐거움이 누군가를 필요 이상으로 착취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닿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선택이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자아도취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 나쁜 건 자신의 선택이 아무한테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믿는 자기기만이다.’

<날씨와 얼굴> P.23




우리가 ‘아유, 나는 못 보겠다’ 며 고개를 돌리게 되는 장면들을 떠올려 본다. 그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가. 이 모든 사태에 나는 일말의 책임도 없는가. 내가 세계에 미치는 영향같은 건, 진정 없는가. 거듭 생각해 보았지만, 자기기만보다는 자아도취가 덜 유해할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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