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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Aug 01. 2023

<작은 땅의 야수들>

Beasts of Little Land


영어  명과 국어, 사회  한 명씩. 도합 4인고교교사가 독서모임을 한다. 넷은 같은 학교에 근무하며 가까워졌다. 같은 학년 담임을 하 소소한 친밀감을 쌓아왔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F(feeling) 성향, 문과, 여성이라는 점 외에도 책을 좋아하고,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지만 일단 한번 연을 맺으면 끝장(?)을 본다는 집요함까지. 연령대는 30대부터 50대를 아우르고 나이와 관계없이 비혼과 미혼이 섞여있다. 남들이 무슨 조합인지 묻곤 하는, 우리의 월례 모임이다.


혼자 완독 하기 어려운 책을 함께 읽어보자는 취지으므로 우리 함께 완독 한 첫 책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였다. 이후로는 신곡, 월든, 데카메론 등의 고전을 주로 읽었다. 시작은 그러했으나 점차 장르의 다양성을 추구했다. 어느 날은 김영하의 신작 소설도 읽고(작가 강연도 함께 들으러 가고), 밌다고 소문난 에세이와 인문학, 철학 분야 서적도 두루 함께 읽었다.


7월의 책은 김주혜 작가의 <Beasts of Little Land>였다. 영어 원작소설인 이 책을 쓴 작가는 9살에 미국으로 건너간 재미교포이다. 미국에서 대단히 높이 평가받았는지 이 책에 쏟아진 찬사가 어마어마하다(책의 맨 앞 여러 페이지에 걸쳐 그 찬사들이 나열되어 있다). 각종 문학상에 노미네이트 된 것은 물론이고 수없이 많은 추천도서목록에 포함되었으며, 12개국에 번역 출판되었다고 한다. 한국어로 번역된 책의 제목은 <작은 땅의 야수들>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술술 읽히는 이야기이다. 영어로 a real page turner.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단숨에 읽었다. 선명한 캐릭터와 그들을 둘러싼 짙은 서사가 돋보인다. 이야기의 배경은 1900년 대 초반부터 1960년 대 한반도.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를 관통하는 우리의 역사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역사가 말해주지 않는 개인의 삶을 내밀하게 보여주는 학의 역할을 다한다. 인물의 기쁨과 고통에 이입하며,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겸허히 자각했다. 소설 속에서 살고 죽는 들을 통해 인간은 시대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확인했다.



열 살에 기생집에 팔려가고 고생 끝에 유명 배우가 되는 주인공 옥희,

기생집에서 만난 친구 연화와 월향,

거리의 깡패로 살다가 독립운동에 발을 담그게 되는 정호,

인력거꾼에서 기업가로 성장하는 한철,

시대의 기회를 따르는 합리주의자 성수,

성수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 사회주의자 명보.


혼돈 속에서 이들 인물의 삶이 어떤 국면을 맞이하는지, 서로 어떤 접점을 형성하는지(나름 극적인 설정이 있다), 그 결말을 몹시 궁금해하며 오롯이 독서에 몰두한 시간이었다.




한편으로는 지극히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이다. 중간중간 개연성이 부족한 전개도 존재한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삼았던 드라마와 영화들, 기존의 역사소설에서 익히 봐왔기에 진부하게 여겨지는 씬들도 존재한. 기존의 훌륭한 한국대하소설들 -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써낸 치밀하고 절절한 서사와 그들이 심도 있게 다루는 정치사상적 담론 - 과 비교해 보면, 작품의 전반적인 깊이와 참신함이 아쉽다.


하지만 이 소설은 영어로 쓰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존재 가치가 충분하다. 전 세계적 혼란의 시기에 한반도라는 변방의 작은 땅덩어리에서 한민족이 겪어내야 했던 일들은 우리에게나 익숙한 서사일 테다. 해외에서 이 책이 크게 화제가 된 것은 소설 <파친코>(2017, 이민진 저)가 선풍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이유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읽힌다. 2차 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약자들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교재로써의 서사. 그 아픔을 전 세계에 알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대하다.






우리 넷은 어느 전통찻집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이 책에 관해 이야기 나눴다. 처음에는 주로 소설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전반적인 감상을 나눈 뒤, 잘된 점과 미흡한 점들을 짚고 넘어갔다(후자 쪽에 기울었고, 국어과 선생님의 예리한 분석력이 돋보였다). 그리고  그렇듯 책에 관한 이야기를 서둘러 끝내고 시시껄렁한 신변잡기적 근황토크로 이어갔다. (그렇다. 독서모임은 그럴듯한 핑계일 뿐, 에서 나누지 못하는 이야기를 자유롭게 떠드는 것이 이 모임의 주목적이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었다. 책을 덮고 수다를 떨고 있는데, 이야기가 자꾸 소설로 회기 하는 것이었다.


- 근데 말예요, 나는 최근에 첫사랑에 관해서 떠올렸는데. 아마 이 책에 나오는 옥희 영향인 것 같아.

- 그러게요, 그렇게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는 게 가능할까요?

- 시간이 흐르면 마음도 변하고, 상황도 바뀌고, 모든 건 달라지는데.

- 그, 근데 옥희는 그 장면에서 정호한테 왜 그런 거지요? 이해가 돼?

- 저도 잘 이해가 안 갔어요. 대체 무슨 마음이었던 걸까요?

- 누군가에게 한눈에 반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경험해 봤어요?

- 경험 있어요! 그건 그 순간 그 사람밖에 안 보이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완전 배경이 되어버리는..

-오! 자세히 말해주세요.

...

- 우리가 인물을 캐스팅한다면 말야, 한철은 누가 어울릴까?

- 인물캐스팅 너무 재밌죠! 한철이는 일단 키가 크고 잘생겨야 하고 몸도 탄탄해야 하는데.. 박서준?!



우리의 대화는 점차 김주혜작가가 지면에 싣지 못한 이야기들 - 부족한 개연성이라고 일컬었던 지점 - 을 각자의 추측과 상상으로 자유롭게 채워나가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자신만고유한 경험을 재료 삼아 열어젖히는 이야기. 이 정도로 무장을 해제해도 되는 건가 싶을 만큼 솔직한 이야기. 가슴 한켠에 묻고 살아온 슬픔과 부끄러움을 꺼내놓으며 나는 무언가로부터 해방되는 듯했다. 친밀한 이들이 동일한 텍스트를 공유하고 나서 털어놓 내밀한 고백과 소통의 향. 그 틈에서 우리의 감정은 가지런히 포개졌고, 그렇게 서로에게 한걸음 더 가닿았다. 책을 읽든 안 읽든, 어떤 책을 읽든 간에, 우리의 독서모임은 계속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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