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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Oct 23. 2023

가을을 보려고(1)



문득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결심했다. 여행을 가야겠다고.

이 가을을 체적으로 보고 싶었고, 그게 선 장소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익숙함과 거리를 두기 위해 가족과도 잠시 멀어지기로 했다. 돌봐야 할 어린이들이 있는 내 처지에서는 크게 마음먹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가족의 수고와 배려를 딛고 내 여행은 시작될 수 있었다. 감사한 마음을 가득 안고 떠났다.



Y와 단둘이 차를 타고 달렸다. 다방면에서 비슷한 결을 가진 우리는 께 있으면 늘 좋은 친구이다. Y와는 3년 전에도 여행을 함께 한 적 있는데, 그때 찍은 영상들로 만들어 준 여행브이로그를 나는 아직도 가끔 꺼내 본다. Y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탁월하게 현재에 집중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날씨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토이와 김동률의 시디를 들으면서 남해고속도로를 운전했다. 그 음악을 듣고 있으니 이십 년 전의 내가 생각나서 아득해졌다. 우리는 북적이는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고 소떡소떡을 먹었다. 가을 햇살에 등이 따뜻해져서 외투를 벗었다. 신이 나서 자꾸만 마음이 들썩거렸다. 차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대화를 나누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믿기 힘들게도, 3시간을 운전했지만 피로감이 거의 없었다. Y가 작년에 혼자 왔었다는 하동, 구례에 나는 처음으로 방문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쌍산재였다.

쌍산재는 아름다운 고택이다.(윤스테이라는 티브이 프로그램 촬영지 하다.) 우리는 입구에서 제공받은 시원한 매실차 한잔을 손에 들고 고즈넉한 공간을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쌍산재의 풍경



도시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공기를 들이마시며 내 호흡은 저절로 깊어졌다. 숲 내음을 맡으며, 팔랑팔랑 거리는 나비들을 가만히 보았다. 고즈넉한 공기와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세상이 이렇게 느리고 고요하고 평화로웠구나. 나는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그토록 급한 마음으로 동동 거렸을까.



섬진강뷰가 보이는 식당에서 재첩과 참게 반찬으로 점심을 먹었다. 강물에 윤슬이 반짝이는 걸 가만히 보면서 누군가가 만들어 준 밥을 먹는 건 그저 축복이었다.




말로만, 아니 노래로만 듣던 화개장터에도 갔다. 말린 나물과 약재 같은 걸 파는 상점이 많았다. 상인분들이 유과, 오란다, 생강청, 도라지청 같은 것을 맛보라고 주셔서 시식했다. 달달한 조청맛의 식감 부드러운 오란다를 한 봉지 사서 여행 내내 야금야금 꺼내 먹었다.




Y의 추천으로 <호호의 숲>이라는 소품샵을 찾아갔다.

작은 마을의 좁은 오르막을 차로 오르고 또 오르니 그 길 끝에 작은 집이 있었다. 이런 곳에 가게가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좋은 냄새가 났다. 사방에 예쁘고 신기하고 유니크한 물건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차임벨을 손으로 쓸어보고 그 소리에 감동했고, 아름다운 천으로 만든 앞치마들이 내 안의 물욕을 마구 깨워냈다. 나는 시골에 와서까지 쇼핑을 하고 마는가.. 맑고 밝은 에너지를 가지신 사장님 꾸뽕 차와 단감을 내어주셨다.


<호호의 숲>


아파트나 공동 주택이 아닌 이런 한적한 곳에 집을 짓고 사는 삶은 어떤 것일까. 나를 보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보여주는 것에 에너지를 덜 소모하게 되고 그로 인한 피로감이 덜할까.

그 여력을 나는 어떤 일에 쓰게 될까. 나에게 집중하면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패턴이 예쁘고 소재가 고급스러운 핸드메이드 앞치마를 사고 싶었다. 연신 걸쳐보며 뭘 살지 고민하다가, 결국은 사지 않기로 했다. 우리 집 주방에는 앞치마가 있지만 나는 그걸 입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소노 아야코는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것보다 그것들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진정한 부자가 된다'라고 했다. 나는 충동적으로 물건을 사는 성향이 다분한데, 자제력을 발휘한 스스로를 한껏 칭찬했다.(솔히는, 집에 돌아가서도 앞치마가 아른거린다면 그 핑계로 이곳에 다시 한번 더 와야지-하는 마음도 있었다.)



친절한 사장님은 우리 숙소 근처의 맛집까지 추천해 주셨다. 우리는 숙소에 체크인해서 잠깐 쉬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한 우리의 숙소는 민박이랄까 펜션이랄까. 곱게 깔린 잔디밭이 있는 2층 주택이었다. 창밖은 말 그대로 논뷰였다. 황금색 들녘이 파도치는 풍광에 우리는 넋을 잃고 감탄했다.


조금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각자 잠시 쉬었다. Y는 책을 읽었고 나는 침대에 누워서 눈을 붙였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여행동반자는 '따로 또 같이'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함께 온 여행에서도 혼자만의 시간은 필요하므로, 가끔은 서로를 가만히 둘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도 Y는 훌륭한 여행 파트너가 아닐 수 없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소품샵 사장님이 추천해 준 맛집을 찾아갔다. <구례 다슬기>라는 동네 식당이었다. 우리는 순두부와 파전과 더덕 막걸리 한잔을 주문했는데, 음식 맛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다슬기 수제비와 더덕 막걸리 한 병을 추가 주문했다. 파전이 남으면 숙소에 가져가서 막걸리와 함께 먹을 요량이었다. 그건 정말이지 현명한 처사였다. 다슬기 수제비도 끝내주게 맛있었기 때문이다.



숙소에 돌아와 음식을 펼쳐놓고 막걸리와 꾸지뽕 차를 함께 마셨다. Y는 핸드폰으로 음악이 끊이지 않도록 틀어두었다. 우리는 요즘 시청하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이야기를 하다가 거기에 나오는 서지원의 <내 눈물 모아>를 들었고, 네버엔딩 스토리와, 민물장어의 꿈과 여러 제목 모를 노래들을 끝없이 들었다. 간혹 대화와 음악이 동시에 끊길 때면, 주위가 적요했다. 도시에서 들리는 그 흔한 자동차 소음조차 전무했다. 그 고요한 적막이 우리를 채워주는 것만 같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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