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드립커피 한잔이주는 충만함은 일상의 큰 행복이었다.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를 양손에 쥐고 커피 향을 맡으면, 마시기도 전에 정신이 번쩍 깨어나는 듯했다. 책이 더 잘 읽히고 일에 집중도가 높아지며운동 능률도 올랐다.
커피 원두를 고르고, 맛과 향을 감별해 보고, 내 나름대로 블랜딩도 해보는 일. 원두를 그라인딩 하고 그 위로 정성껏 물줄기를 내리는 그 모든 과정이 나에겐 의미 있는 리추얼이었다. 이 즐거움을 더 깊이 탐구하고 싶어서,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걸 나누고 싶어서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취득했었다.
또한 나는꽤 건강체질이라고 믿어왔다.
비염 같은 잔병도 없었고, 감기는 일 년에 한 번 걸릴까 말까 했다. 카페인에도 딱히 예민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커피 마시면 잠을 못 잔다고들 하던데 나는벤티 사이즈아메리카노를 마시고도 밤에 숙면했다. 얼마 전까지는 말이다.
뭔가 자연스럽지 않은 몸의 반응을 느낀 건 올해부터다. 최근에 깊은 밤마다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고, 감기에 자주 걸린다. 지난달 말부터는 몸살감기, 코감기, 목감기가 차례로 찾아왔다. 요 며칠은 목이 심하게 부어서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었다. 찢어질 듯 건조한 목을 더 건조하게 만드는 커피를 마시는 건 언감생심이었다.대신 생강차, 대추차, 캐모마일, 루이보스, 배도라지차 같은 걸 달고 사는 중이다.
커피를 마시지 않은 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처음 1-2주일 간은 정신에 안개가 낀 듯 맑지 않았다. 깨어있는 시간 내내 멍하고 졸리고 무기력했다. 이럴 때 커피를 한잔 들이켜면 깨어나는데..! 너무잘 알지만 마실 수 없다. 그어느 때보다 커피가 간절했다. 말로만 듣던 카페인 금단현상은 실로 심각한 것이었다. 주로 커피를 마시던 시간 즉, 아침에 눈떴을 때와 매 식사 후에 특히 허전하다.
우리 뇌에는 온종일 아데노신이라는 이름의 화학물질이 쌓이고, 이 아데노신이 우리에게 졸립다는 신호를 보낸다. 카페인은 이 아데노신의 양을 파악하는 수용체를 차단한다. "저는 이 현상을 연료계 위에 포스트잇을 붙이는 것에 비유합니다. 카페인을 마심으로써 스스로에게 연료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연료가 얼마나 텅 비었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죠. 카페인이 없어지면 두 배로 피곤해집니다."
- <도둑맞은 집중력> 중
커피를 마시고도 일상에 아무 문제가 없을 때는 그냥 지나쳤을 문장들을 이제 정독하게 된다. 나는 내 몸의 아데노신이 보내는 정직한 신호를 왜곡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중이다. 누군가에게 크게 빚지고 살아오다가 비로소 빚청산을 하고 더듬더듬 살아가는 듯한 기분이랄까. 내 몸에서 독소가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이 나쁘지만은 않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의문이 든다.
이건 마치 두통이나 생리통을 겪을 때 타이레놀을 복용하지 않고 쌩몸(?)으로 통증을 견디는 것과 다르지 않음이 아닌가? 게다가 커피 한잔이 주는 사소한 기쁨이 사라지자 뭔가 중요한 걸 잃어버린 기분이다. 내가 커피를 끊고 있다고 말하자 가까운 직장 동료가 말했다. 쌤은 술도 안 마시잖아요, 이제 커피도 안 마셔요? 무슨 재미로 살아요?
그러게, 나는 무슨 재미로 사는가. 그냥 커피를 다시 마시는 게 여러 모로 나을까.
(술에 관해서라면, 타고난 체질상 맞지 않아서 마시지 못한다. 소주 한 잔만 마셔도 온몸이 벌겋게 되고 한잔 더 마시면 심장이 쿵쿵쿵 미친 듯이 뛰면서 급 졸음이 몰려온다. 이내 몸을 가누기 어려워지다가, 잠든다. 내 부모님을 떠올려보면 피할 수없는 유전적인 반응이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보니 의외의 좋은 점들도 있다. 가장 크게 와닿은 건 커피값을 아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커피전문점에서 매달 지출하던 돈, 원두와 커피캡슐을 구매하던 돈이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두 번째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는 점이다. 매일 아침 출근 직후, 점심을 먹고 난 후 그 촉박한 시간 속에 나는 부지런히 커피를 내려왔다. 요즘에는 그 시간 동안 느긋하게 다음 수업을 준비한다. 시간적 여유는 생겼는데 어쩐지 마음의 여유는 더 줄어든 것 같은 아이러니한 기분이긴 하지만.
밤에 잠을 더 잘 자는 것 같긴하다. 사실상 온종일 졸린 상태로 밤이 되기만을 기다리니 그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최근에 꿈을 몹시 생생하게 꾸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카페인과 관련있는 지는 잘 모르겠다.
스타벅스앱에서 알림이 왔다. 톨아메리카노를 3000원에 주는 행사를 한다고?! 예전 같았으면 거의 백 프로의 확률로 퇴근길에 스벅 드라이브쓰루로 진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블루샥 커피앱에서는 아메리카노 무료 쿠폰이 도착했단다. 잠깐, 무료인데..? 천 원만 추가로 지불하면 디카페인으로 마실 수 있다는데, 한잔만 마실까? 잠시 고민했지만 가지 않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