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의 TMI

by La Francia

아침밥으로 자매에게 장조림버터밥을 만들어줬다. 지난 주말에 엄마한테서 받아온 귀한 장조림이다. 아이들이 하도 좋아해서(삼일연속으로 같은 메뉴를 요청했을 정도) 나는 맘껏 먹을 수도 없다. 내 엄마가 특히 잘 만드는 음식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식혜와 장조림이 대표적이다.(김치찌개와 아구찜 여느 맛집보다 훌륭하다.) 이 두 가지 음식을 홈메이드로 먹고 자라온 나는 어느 날 처음으로 밖에서 이것들을 맛보고(캔 식혜와 마트 반찬코너에서 산 장조림이었다) 큰 충격을 받았었다. 이게 무슨 식혜야, 맹물이구만. 장조림맛이 왜 이래? 이런 내 반응과 달리 함께 먹던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서 또 한 번 놀랐던 기억이 있다.



밥을 먹는 아이들 맞은편에 앉은 나는 그릭요거트에 사과와 바나나를 썰어 넣고 버무려 먹었다. 압력솥에 5분간 삶은 반숙 달걀도 곁들였다. 이디스워튼의 <여름>을 읽으면서 한 시간 동안 식탁에 앉아있다 보니 배가 고파져서 이내 한 끼를 더 차렸다. 어제 만들어놓은 당근라페에 호밀빵과 모차렐라치즈, 토마토, 루꼴라를 한 접시에 담아서 따로 샌드위치 느낌으로 와구와구 먹었다. 어제저녁에 트래드밀에서 9k를 뛰고 상체 근력 운동까지 하고 돌아왔을 때 엄청나게 허기졌는데, 단백질 쉐이크 한 컵만 마시고 잔 건 역시 잘한 일이었다. (아이들이 라면 먹자고 졸랐지만 밤 9시여서 안된다고 했다. 사실 엄청 먹고 싶었다.) 요즘은 저녁 6시 전에 식사를 마치고 밤 10시에는 잠자리에 들려고 노력한다. 일찍 자면 삶의 모든 측면이 좋아진다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8-9시간의 숙면을 하고 나면 다음날 내내 좋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고(머리가 맑고 몸이 가벼움), 근손실을 막을 수 있으며, 밤에 훅 찾아오는 식욕(대체로 가짜 배고픔임)을 아예 마주할 일이 없다(자고 있으므로). 책이 더 잘 읽히고, 운동 능률도 오를 뿐 아니라 충족감은 마음의 여유가 되어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지 않을 수 있다. 김영민 교수는 <가벼운 고백>에서 '인생이란 먹고 자는 사이에 짬을 내 뭔가를 하는 것이다. 혹은, 뭔가를 하는 척하면서, 하기 전후에 먹고 자는 것이다. 따라서 잘 먹고 잘 자는 게 중요하다.'(49쪽)라고 말했다. 지당한 성찰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두번째 아침


요즘의 아침 식사


올해 마지막 인바디


연말에 독서모임에 나갔더니 누군가가 '연말 독서 결산'을 하자고 했다. '올해의 000' 라는 키워드는 내가 듣는 팟캐스트에서도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언급되었다. 지난주 지인들과의 모임에서는 서로 '신년 계획'을 물었다. 한해를 단위로 뭔가를 정리하고 계획하는 일. 그건 예로부터 내가 어려워하는 일이다. 나는 모든 종류의 정리정돈과 수납 보관과 계획 세우기에 취약하다. 지금 두드리고 있는 노트북이 올려져 있는 식탁위만 해도 온갖 잡동사니들이 함께 널브러져 있다. 읽다만 책들 네 권(그중 펼쳐진 건 두 권), 그래놀라봉지, 귤 세 개가 담긴 그릇, 썰어놓은 사과가 담긴 접시, 밀폐용기에 담긴 남은 당근라페(아직 냉장고에 안 넣었네), 아이들 수학문제집, 한자 학습지, 종류가 서로 다른 머리빗 2종, 바나나가 걸려있지 않은 바나나걸이(바나나를 언제 다 먹었지?), 각티슈, 식은 녹차가 담긴 머그컵, 어제 헬스장에 들고 갔었던 물병, 보조배터리가 연결돼있는 내 핸드폰, 타자 치느라 풀러 놓은 스마트워치, 블루투스 스피커, 음악재생용 폰, 폰 거치대... 보통 이런 걸 다 치우고 난 뒤글을 쓰든 책을 읽든 하지 않느냐고? 나는 복잡한 가운데 틈을 만들어 노트북과 책을 펴는 쪽이다. 사람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


올해 읽은 고전


예의 연말 결산과 신년 계획에 대해 간신히 대답은 했다. 올해의 책으로는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 영화로는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 올해 이벤트로는 여름에 다녀온 일본 한 달 살기, 그리고 올해 목표는('계획'보다 말하기 쉽다, 계획은 없으니까..) 복직해서 잘 적응하기. 나는 3월에 복직을 한다. 2년간의 휴직을 끝내고(이전 휴직까지 도합 6년 6개월), 마침내 학교로 돌아간다. 자율연수휴직이라는 것까지 당겨 썼으니 이제 나에게 남은 휴직은 없다. 다음 달 초에는 일주일 간의 복직연수도 들어야 한다. 그건 2년 이상 휴직했던 자들이 필수로 수강해야 하는 연수이다. (휴복직 경력자인 나는 복직연수도 재수강이다.) 첫 복직 때는 많이 긴장해서 덜덜 떨었는데, 세 번쯤 복직하니 이제 담담한 마음이다.



3월부터는

아침에 잠옷을 입은 채로 아이들에게 아침밥을 차려주고 아이들이 학교 가면 다시 소파에 드러눕는 일상은 없을 것이다. 아침 10시에 아파트 헬스장으로 향하는 느린 걸음도, 정오에 거실에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즐기는 오수도 없을 것이다. 오전에 영화관에 가서 혼자 영화를 보거나 프리랜서 친구를 만나 브런치를 먹는 일도 없을 테고. 아이들에겐 학교 다녀왔을 때 간식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는 엄마가 없을 것이다.(간식 다 먹었으면 책 펴라는 엄마도 없겠지.) 잠들기 전에 침대에서 책 읽어주는 엄마도 보기 어려울 것이다.(출근하면 수업 때 말을 많이 해서 늘 목이 아프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는 법. 출근하는 나에겐 무엇이 있을 것인가. 매일아침 시간 맞춰가야 할 곳, 소속감, 따박따박 월급, 사회적 미소, 점심 급식, 나이스인증서, 쏟아지는 공문서, 나에게 소속될 스무몇 명의 고등학생들, 우리 반이라고 부르게 될 오래된 교실, 늦은 오후의 짙은 피로감, 더 잘하고 싶어서 안달 나는 마음, 그럴듯하게 보이고 싶은 욕망, 더 깊어질 미간 주름, 쓸데없는 소리 한 것에 대한 후회, 그때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며 회한하는 귀갓길. 갑작스럽게 터질 웃음 혹은 눈물. 삶의 무게와 노동의 실존과 보람 혹은 긍지의 찰나 같은 것?



거실에 앉아서 가습기 물멍을 하고 있는 지금.

아이들이 학교 간 사이에 집안의 공기는 고요히 가라앉아있다. 나는 오늘 무엇을 할지 생각 중이다. 일본어 공부도 해야 하고(곧 듀오링고 레벨 30이다), 수능특강 영어 문제도 풀어봐야 하는데 조선왕조실록도 마저 읽고 싶다. 선킴의 ‘한국사 완전 정복’ 팟캐를 들으면서 조선 역사에 빠져들어서 지금 영조를 지나 정조로 향하고 있다. 엊그제는 넷플릭스로 영화 ‘사도‘를 다시 봤다. 유아인배우 연기가 절절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사도세자를 죽인 건 왕이었을까, 아버지였을까..



산만하게 뻗쳐나가는 내 의식을 글로 옮기고 있다. 지금 이대로 멈춰있지 않을 내 모습, 내 상태, 그리고 한 해가 끝나고 새해를 맞는 요즘의 내 마음을 내 방식대로 정리해 보았다.. 고 마무리해 본다. 나는 늘 그랬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아서 자꾸 일을 벌인다. 순차적으로 하면 될 텐데 참으로 동시다발적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감각이 더욱 나를 산만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럴수록 올해는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실행해 나가기를. 밥을 잘먹고 잠을 잘 자면서 부디 일터에서 잘 헤쳐나가기를. 몸과 마음이 한 곳에 머무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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