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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Dec 31. 2022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모든 사건 속에는 개인이 있다는 걸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은 무섭도록 분명해진다. 이를테면 고통, 유서를 완성하겠다는 모순된 의지로 지난 몇 달을 버텨왔다는 것. 자신의 삶이라는 지옥에서 잠시 빠져나와 친구를 병문안하고 있는 이 순간이 기이하게 낯설고 선명하게 느껴진다는 것.



  소설은 온통 눈이다. 성근 눈이 내리는 화자의 꿈으로 시작하여, 한라산의 중턱의 폭설, 그리고 70년 전 제주의 어느 학교 운동장에 스러진 수백 명의 얼굴에 쌓이던 눈까지. 이유 없이 죽어야 했던 삼만 명의 사람들과, 적의 편으로 낙인찍힐까 유해를 수습하지도 못한 유족들. 그 침묵의 절규는 하염없이 쏟아지는 함박눈에 묻혔다. 눈 결정 속의 텅 빈 공간이 소리의 잔향을 빨아들임으로써 실제로 주변을 고요하게 만드는 것처럼.



  어떤 사건은 그것에 연루된 모든 개인의 서사이다. 모든 인간에게 존엄이라는 가치는 기본값이므로 우리는 단 한 사람의 희생에도 애도를 표한다. 하지만 때로 우리는 팍팍한 삶 속에서 어떤 사건을 그저 한 사건으로 인식한다. 그 속에 무수한 개인이 있다는 걸 놓치고 마는 것이다. 근현대사 수업에서 들어서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5월 광주를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에서 오롯이 마주했을 때, 나는 이 사실을 처참히 깨달았었다. 광주의 한가운데서 죽은 그 소년의 혼에 이입하여 사태를 직시했고, 고통과 슬픔에 부들부들 떨며 울었다. 이번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제주 4.3을 보여준다.



  소설 속 화자(경하)의 친구인 인선. 인선의 어머니는 사건에서 가족을 잃고 살아남은 생존자이다. 당시 엄마가 직접 본 것과, 그 일이 있은 후 동분서주 살아온 엄마의 삶, 노쇠하여 병약해지고 난 후의 기이한 행동들을 인선의 입을 통해 듣는다. 내 친구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듯 몰입했고, 내 친구를 걱정하듯 인선을 안타까워했다. 엄마가 죽고 나자 인선은 홀연히 엄마의 발자국을 따라 밟는다.


오십 년 봉인이 해제된 후 접근 가능해진 미군 기록물들과 당시 언론 보도, 1948년과 1949년에 재판 없이 수감된 제주 수형인 명부와 보도연맹 학살 사이에서 사건들을 복기했어. 자료가 쌓여가며 윤곽이 선명해지던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가 변형되는 걸 느꼈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 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 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
그게 엄마가 다녀온 곳이란 걸 나는 알았어. 악몽에서 깨어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면, 그 얼굴에 끈질기게 새겨져 있던 무엇인가가 내 얼굴에서도 배어 나오고 있었으니까.

내 인생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었어. 오랫동안 애써야 가까스로 기억할 수 있었어. 그때마다 물었어. 어디로 떠내려가고 있는지. 이제 내가 누군지.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 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었으니까.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 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골짜기와 광산과 활주로 아래에서 구슬 무더기와 구멍 뚫린 조그만 두개골들이 발견될 때까지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고, 아직도 뼈와 뼈들이 뒤섞인 채 묻혀있어.

그 아이들.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


  소설의 초반(1부 : 새)은 마치 눈 때문에 앞이 희미한 형국이다. 심적으로 나락에 떨어져 있는 경하와 갑작스레 큰 부상을 입고 상경한 인선이 조우하고, 인선의 부탁으로 경하는 급작스럽게 제주로 향한다. 폭설이 내리고, 경하는 죽을 고비를 넘기며 인선의 집에 당도하는데, 당초 제주행의 목적이었던 인선의 앵무새는 이미 죽어있다. 소설의 중반부(2부 : 밤)부터는 현실과 환영을 넘나 든다. 추위와 고질적 두통에 고통받던 경하는 전날 죽은 새가 새장 속에 멀쩡히 살아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이윽고 눈앞에 인선이 나타난다. 환상인지 실제인지 모를 인선은 경하를 어딘가로 데려가고, 긴 이야기를 들려준다.



  새는 죽었고, 그것을 구하러 온 누군가는 죽은 것을 조심스레 땅에 묻어준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살아난 새는 사뭇 상징적이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인선과 경하가 눈 속에서 들고 있던 초가 꺼진다. 괜찮아. 나한테 불이 있어. 하고 경하가 주머니 속 성냥갑을 꺼낸다. '숨을 들이마시고 성냥을 그었지만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보여주는 의미일 것이다. 이렇듯 작가는 내밀하고 은폐된 것을 여타의 방식으로 세상에 이야기하고, 이런 메타포를 통해 우리에게 관점을 제시한다. 얼마 전 누군가 나에게 '한강은 위대한 작가인가'라고 물었을 때 고민 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했던 이유이다.



  학살을 취재하고 고통의 현장을 목도한 후 사실적인 문장으로 복기시키는 일을 했을 작가의 마음을 헤아려보았다. 고통 없이 할 수 없는 일임에 분명하다. 문득, 스틸컷으로만 봐왔던 작가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싶어서 영상을 찾아보았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한 구절을 낭독하는 작가의 얼굴을 보았다. 다시 책을 펼치고 그의 차분한 음성을 눈으로 좇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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