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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지음 Nov 24. 2020

숨은 쉬고 사니

인생의 띄어쓰기가 필요할 때

 오래간만에 운동을 했다. 사실은 운동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10분짜리 스트레칭을 따라한 게 다다. 남들은 가뿐히 따라 할 것 같은 스트레칭이었는데, 운동 초보가 아니라 초초초보인 나에겐 따라 하기 너무나 벅찬 그대였다. 그런데 겨우 고작 그거 했다고 땀이 좀 나고, 온몸에 피가 도는 게 느껴진다. ‘아, 내가 살아있는 존재가 맞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조그마한 성취감이 따라왔다.


 무슨 일이든 남들 다 하는 수준밖에 못하는데도 몸 상태만큼은 남들 다 가진 수준도 못 돼 늘 허약했던 나는, 그런 약함을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 버티는 데는 장사 없다(?)고 그런 내 노력이 가상했는지 그래도 웬만한 일들은 꽤 괜찮은 결과를 내곤 했다. 오로지 몸 쓰는 일만 빼고. 물론 가끔 ‘줄넘기 X자 뛰기’ 같이 소소하게 몸 쓰는 일에서는 성공을 맛보기도 했지만 말이다.

 공부를 할 때도 나는 비슷한 태도로 임했다. 누가 공부는 ‘엉력(엉덩이 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목표를 하나 정하면 정말 엉력으로 끝을 보려는 타입이었고, 그런 엉력 덕분에 좋은 성적을 받기도 했으니 엉력(이라 쓰고 노오력이라고 읽는다)은 나만의 큰 강점이었던 게 분명하다.




 취업준비를 할 때도,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에도 나는 이런 태도를 계속 유지했고, 또한 그게 굉장히 좋은 삶의 자세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신입이라 실수할 때도 많았지만, 적어도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 자신은 알고 있었기에 떳떳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내 노력이 조금씩 인정받는 것도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하는 시간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피곤에 절어 운동은커녕 잠들기 바쁜 시간들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나는 몰랐다. 내 몸이 조금씩 고장나고 있다는 걸.


 직장생활 3년 차. 눈치가 빠르다기보다 눈치를 많이 보는 나는 지금껏 살아온 삶의 방식대로 허약한 내 몸을 여전히 밀어붙이고 있었고, 그런 몸은 이제 더는 나를 참아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결국 퍼질러져 버렸다. 30대 초반에 편두통으로 인한 이석증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 애매하게 중간에 끼어 막내와 윗분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 신세처럼, 오갈 데를 못 찾은 ‘이석’이가 도대체 귓속 어디쯤에서 방황하고 있었기에 내 머릿속은 그렇게 어지러웠던 걸까 지금도 의뭉스럽다.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는 유명한 병원 대기실 의자에 앉아 그 많은 환자분들(특히나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 사이에 근 2시간째 있다 보니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열심히 산다는 게, 이런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구나.’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꼈던 순간이었다. 아니, 어쩌면 ‘내 이럴 줄 알았지.’ 하고 내 몸이 나를 비웃은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글을 ‘잘’ 쓰고 싶어서, ‘좋은’ 글을 쓰고 싶어서 백지 위에 깜박이는 커서를 끈덕지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문득 뭐라도 써보려고 스페이스바를 한 번 눌렀다가, ‘에이, 오늘도 안 되겠다. 좋은 글은 무슨….’ 하며 화면 오른쪽 위 X자 버튼을 누르는 순간, 「빈 문서 1을 저장할까요?」 하는 알림창이 떴다. ‘아… 이 띄어쓰기 한 칸이 뭐라고….’ 나에겐 아무것도 아닌 스페이스바 한 번이, 컴퓨터에겐 저장할지 말지 고민해야 할 큰 변화란 사실을 나는 그제야 알았다.


 인생도, 글쓰기도, 일도, 모두 다 잘하면 좋겠지만 꼭 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그저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으며 사실은, 늘 그러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띄어쓰기 한 칸이 아무것도 쓰지 못한 빈 문서보다 훨씬 큰 의미가 있듯, 고작 10분짜리 스트레칭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저녁시간보다 훨씬 큰 의미가 있다. 별 거 아닌 이 작은 ‘띄어쓰기’들이 모여 다음의 나는 어떤 모습이 될지 나도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아니다, 어떤 모습이 되지 않아도 뭐 어떤가. 그렇게 소소하게 띄어쓰기라도 해보는 내가, 참 기특하고 훌륭해서 그걸로도 충분한 시간을 우리는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오늘 밤은 그렇게, 기특한 마음으로 잠들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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