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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지음 May 20. 2021

밑바닥이 그대를 부를지라도

아차, 내 인생의 책임자는 나였구나.

 여행의 마지막 숙소를 나는, 이번 여행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걸어서 5분이면 해변가에 도착할 수 있는 곳에다 얻었다. 그러나 차가 없는 뚜벅이는 이전 숙소의 체크아웃 시간과 새 숙소의 체크인 시간 사이 간극을 메꿀 방법이 없었으므로, 새 숙소에 캐리어만 맡기고 무거운 배낭을 멘 채로 해변가를 거닐 수밖에 없었다.


 '우와-'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해변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그동안 묵었던 숙소는 관광지와 멀었기 때문에 숙소 근처에서 이런 인파를 보기는 처음이어서 당황스러웠다. 더군다나 여행 3주 차에도 적응이 되지 않는 바닷바람에, 내 앞머리는 이미 주인의 시야 따위 어찌 되든 상관없이 신나게 눈 앞에서 그네를 타는 중이었다.


 그래도 바다는 언제 어디서나 늘 아름다워서, 할 건 해야지 하는 비장한 마음으로 바다 사진을 찍고 해변가를 조금 거닐었다. 그렇게 바닷가 근처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리고, 인근의 유명한 기념품샵을 들어갔다 나오는 길. 바다가 잘 보이게 1층 의자들이 다 창가를 향해 놓인 카페 안의 사람들이 문득 보였다. '와, 저기 있으면 나처럼 지나가는 사람들 다 동물원 원숭이 되겠다.' 하고 생각하던 찰나, 동물원에 새로 입성한 신입 원숭이가 잘 봐달라고 신고식을 시작했다.


 그 카페 앞 인도에는 정말 미묘한 높낮이의 턱이 있었는데, 초행길인 데다 길 한가운데서 그런 턱을 여지껏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나는 당연한 수순처럼 그대로 거기에 발이 걸렸다. 그렇게 대자로 엎어질 뻔한 걸 겨우 모면하고 그다음 스텝에서 다행히 착지에 성공했지만, '왁-' 소리가 절로 나와 버렸고 팔은 이미 대차게 하늘을 향해 만세한 뒤였다. 넘어지진 않았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넘어진 것과 진배없는 상황. 정말 너무 부끄러워서, 아픈 것보다 부끄러운 게 너무 심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지경이었다.



 사람 구경하느라 앞을 못 본 건 나면서, 마음으로 엄한 동네 탓을 하기 시작했다. '이 동네는 뭐가 이래, 역시 관광지는 별로야, 숙소를 괜히 여기로 잡았나, 뚜벅이는 서러워서 살겠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면서 그날, 아직 반나절도 넘게 남은 하루를 망쳐 버릴 뻔한 순간. 아차, 싶은 마음에 버스 시간을 확인하며 급하게 걸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체크인까지 어정쩡하게 남은 시간, 아무리 그래도 방금 그 앞에서 자빠질(!) 뻔한 카페에는 도저히 못 들어가겠고 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카페로 가기 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누군가의 후기대로 조용하고 한적한 카페. 먹어보고 싶은 커피 메뉴와 케이크를 시켜놓고 앉아 브런치에 올리려고 적어뒀던 글을 손보기 시작했다. 간발의 차로 나보다 조금 늦게 들어온 옆 테이블 손님들의 시끄러운 얘기 소리 때문에 집중이 조금 덜 됐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따뜻하고 충만한 시간이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마저 다정하고 아늑한 카페여서 더 그랬을까.


 시간도, 공간도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기고 나니 기억하고 싶지 않은 좀 전의 상황을 돌이켜 볼 여력이 생겼다. 그러고 나니 보였다. 아까 그 해변가에서, 내가 모르는 사이 길을 걷는 나를 본의 아니게 (엿)보고 있었을 카페 안의 사람들에게 모종의 불만 같은 것이 차올랐던 내 마음이.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눈에 내가 동물원 원숭이(로 대표되는 구경거리)가 된 것만 같아 기분 나빠하다가, 정작 바로 발 밑의 턱은 보지 못했던 나 자신이.


 그래, 늘 누군가를 탓하고 싶은 인생이지만 언제나 돌이켜 보면 나를 넘어지게 하는 건 나 자신이구나. 어쩌면 누구도 나를 넘어뜨릴 의도가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설누군가 내 허락 없이 나의 정원에 들어와 겨우 가꾼 꽃들을 파헤친다 하더라도, 그 꽃을 다시 가꿀지 말지는 책임자내가 결정할 수 있 걸 나는 잊고 있었구나.




 그렇게 동물원 속에 갇혀 울고 있을 뻔했던 그 영장류는, 그 뒤로도 몇 번 더 발을 삐끗하는 등골이 오싹한 상황을 경험했지만 다행히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만세쇼 뒤로도 며칠이나 더 그 동네에 머무르며, 잊지 못할 만큼 예쁜 것들을 많이 보고 느끼고 그곳을 떠났단다.


 마지막으로, 그 동네엔 그 턱 때문인지 모지만 남겨 두고 온 마음과 아쉬운 것들이 많아 조만간 꼭, 다시 가 보고 싶다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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