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 칸트가 산다

아무도 아닌 존재가 안부가 궁금한 존재가 되기까지

by 케잌

1. 우리 동네에 칸트가 산다.

2. 시계처럼 정확한 시간에 산책을 했다는 칸트처럼 매일 아침 8시 18분에 우리 집 앞을 지나가는 아저씨가 있다.

3. 단지, 아저씨는 산책을 나온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이동 중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듯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금세 시야에서 사라진다.

4. 아저씨처럼 시간에 정확하지 못한 나는 종종 8시 18분에 창문을 내다보는 것을 깜박하곤 하는데, 그럴 땐 왠지 무척이나 아쉽다.

5.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 때가 되면 '칸트 아저씨 올 시간이네'라며 기다리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6.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볼 때 뭔가 대단한 발견을 해보겠다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한 건 아니었다.

7. 칸트 아저씨가 처음 내 눈에 들어온 계기가 있었을 텐데, 아마도 항상 오른손에 꼭 쥐고 다니시는 스트라이프 무늬의 작은 가방이었던 것 같다.

8. 스치듯 보고 잊었던 가방을 어느 날 다시 한번 보고 알아차리게 되면서 그걸 들고 있는 사람에 주목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9. 우연히 알아차린 그 아저씨가 사실은 매일 아침 정확한 시간에 이 길을 지나간다는 것을 관찰하게 되고, 그렇게 '칸트 아저씨'라는 별명까지 갖게 되면서부터는 더 이상 아무도 아닌 존재일 수 없게 되어버렸다.

10. 오늘은 아저씨가 안 지나가신 것 같은데, 쌀쌀한 날씨에 감기에라도 걸린 건 아닌지 안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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