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연 Oct 04. 2022

사내정치에도 간신이 있을까

모든 권력은 간신을 원한다 - 이성주




  수 년째 사회생활을 해오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모든 게 결코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것이다.

(저 사람은)왜 저러지? 저렇게 말한다고? 그런 행동을 한다고? 하루 수십번도 더 하는 생각이다.

전체 사원 백 명이 안되는 중소규모의 회사라고해서 순탄하게 흘러가지만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특히 내가 속한 부서는 30여 명 남짓인 작은 규모인데도 직장내 괴롭힘, 성희롱 등의 사안들로 법적 다툼을 벌인다거나 구성원 간의 크고 작은 갈등들이 숱하게 일어나고 있다. 문제를 일으키는 개인을 욕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저런 개인을 길러냈다거나 애당초 싹을 자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조직을 탓해야 하는건지 모르겠다.


  여러가지 일이 벌어지는 만큼 사내정치 또한 숱하게 일어난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건 물론이고 앞에서는 세상 좋은 사람처럼 웃고 농담을 실실 흘려도 뒤에가서는 물고 뜯고 근거없는 소문까지 퍼뜨린다.


  간사한 이들로 넘쳐나는 사회생활을 빗댄 것 중 오죽하면 이런 얘기도 있을까.

아침에 출근해서 "나 오늘 퇴근하고 영화 '삼진그룹토익반' 보러갈거야."라고 말했더니 점심 즈음엔 동료가 "너 토익공부한다며?"라고 하고, 퇴근할 때 즈음엔 "너 이직한다며? 그래서 토익시험 봤다며."가 돼 있단다.


  나만의 철칙 중 하나는 근거없는 소문을 퍼뜨리는 자를 멀리하고, 혹여라도 그런 간사한 자의 말을 믿었다거나 궤를 같이한 자 역시 배척하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 둘 거르면서 사내 인맥쌓기는 사실상 포기해왔다.

분명 발견되지 못한 원석같은 이들이 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개방적 폐쇄형인 나는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면서도 인간관계를 배척해왔다. 삭막한 점도 있었지만 편하고 좋은 점이 더 많았다.

우선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지 않게된다는 것. 그리고 말 자체를 하지 않으니 말로 인한 오해를 받게 될 일도 적었다.


  다만 회사에서의 재미는 없었다. 사람은 지극히 사회적인 동물이라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더라도 결국 사람으로부터 위안을 얻을 수 밖에 없는 구조다. 그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할 경우 인간은 반려동물을 키우거나 식물을 기르고 혹은 또 다른 제3의 '것'에 정을 주게 되는데, 나의 경우는 그것이 책이었다. 


  나의 직업을 적용해봤을 때는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긴 해도 그렇다고 이해가 되는 것도 아니다. 하루종일 글과 텍스트를 끼고 살고 또 그것으로 먹고 살고있는데 굳이 또 활자를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는다니.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또 이해가 된다. 활자는 거의 유일하게 내가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읽고 싶을 때 읽을 수 있고 우울할 때 꺼내어 읽으면 내게 위안을 주며, 읽는만큼 내 안에 남아서 지식을 늘려주기까지 한다. 모든 것이 가변적인 이 시대에 참으로 정직하다.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특성으로 묵묵히 옆에 남아 나를 지켜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시시각각 변하는 건 어쩐지 신물이 난다. 어렸을 때는 막연히 "하루하루 버라이어티 하게 살고싶어!"라고 생각하며 지금의 일에 대한 꿈을 키웠는데 막상 '으른'이 되고보니 특별하기보다는 그저 평범하게 그리고 무탈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이 가장 소중한 것임을 알았다. 매일같이 버라이어티한 삶은 너무나도 힘에 부친다‥


  매일같이 아이템을 발굴해내야하고 또 그것을 다루고 하나의 형태로 완성시켜야 하는 일은 너무나도 나 자신을 소진하는 일이다. 뭔가 기록을 통해 남기고는 있으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소진되는 느낌.

그 소용돌이 안에서 유일하게 내가 컨트롤 할 수 있으며 백익무해 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읽는 행위'다.


  앞서 말한 것 처럼 그렇게 크지 않은 규모의 회사를 다니고 있긴 하지만 일어나는 일들과 갈등은 큰 기업 못지 않았다. 어딜가도 이런 것일까. 돌고도는 구설 안에서 사내정치가 만들어지고, 직업 특성상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고싶다는 초심을 가지고 한 자리에 모인 이들이지만, 초심은 초심일 뿐 대개는 각자의 이익 앞에 칼날이 무뎌졌다. 대신에 서로를 향한 칼날만 서슬이 시퍼렇다.


  회사생활을 수 년 째 하다보니 '사내정치', '권력' 이런 것들이 평소 나의 관심사 아닌 관심사가 됐다.

그렇다보니 어쩌다 읽으려고 찾은 책도 자연스럽게 그런 종류에 가까운 것들이 있었는데 그렇게 하여 읽게 된 게 바로 이 책 <모든 권력은 간신을 원한다>이었다.


  읽다보면 어쩐지 저자는 간신들을 최후변론해주고 싶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내가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고민 중 하나인 '개인을 탓할 것인가 혹은 조직을 원망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후자라고 슬그머니 흘려주기라도 하듯이.


중요한 점은 이런 욕심 많고 무능한 자들을 걸러내는 구조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도자의 책임이고 덕목이다. 그리고 선조는 이 책임을 도외시했다. 알았으면서도 일부러 잘못된 선택을 했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위해 모험을 한 것이고, 왕으로서 부적합한 옹졸한 선택을 내린 것이다.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가리기위해 더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대목이다.


  자신의 잘못을 가리기 위해 '더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건 다음과 같다.


7년 내내 도망만 다닌 주제에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목숨걸고 싸운 이들의 공을 제외시켰고 나아가 7년 전쟁에서 최악의 패전이라 할 수 있는 칠천량해전을 '포장'까지 했던 것이다. 어쩌면 선조는 원균에게 일등공신 자리를 주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순신을 미워하는 마음, 자신의 실수를 덮어야 하는 절박함이 그보다 더 컸을 것이다. 자격없는 원균이 일등공신이 된 까닭은 여기에 있다.


  역사공부를 위한 글은 아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한 줄 첨언하자면, '칠천량해전'은 1597년 정유재란 때인 조선 선조 30년에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경상남도 거제시 칠천량에서 왜군과 벌인 전투다. 왜군의 기습을 받아 조선 수군이 대패했고 이 전투 후에 남해의 제해권을 잃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원균이 수장이 되기 직전에 우리가 잘 아는 그 '이순신'이 그 없는 인력과 척박한 환경을 가까스로 일궈서 간신히 일으켜놨더니 원균이 홀랑 말아먹은거다.


소대장 감도 안되는 이를 데려다가 사단장을 시켰을 때 문제가 터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원균의 능력이 자신이 앉은 자리보다 부족한 것은 원균의 잘못이 아니다. 그에게 비리가 있다고 해도 당시 다른 벼슬아치들보다 견줘보면 허용범위 안이다. 이순신을 질투해서 자신의 능력을 과대포장한 장계를 올린 것도 있으니 인간의 속성에 비춰보면 이해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 공명심이 있고 명예욕과 출세욕이 있는 이들에게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알량한 개인의 잘못이냐 묵인한 조직의 잘못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저자는 그에 대한 부연설명을 해놨다.


적당히 비겁하고 때때로 정의로우며 사익 앞에서 공익을 추구하고자하는 마음이 흔들리고, 대의를 앞세우지만 개인의 욕망에 굴복하는 것이 평범한 얼굴을 한 인간의 모습이다. 


  때문에 '사회에 휘감겨 살아가는 사람', 특히 '한국과 같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대세라는 것에 짓눌린다'고 덧붙였다.


  저 위 문장은 나라는 인간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열심히 일하려고 임했다가 또 조직 내 일말의 좌절감을 맛보고 내가 미쳤지 왜 쓸데없이 갈아넣었을까 하고 되뇌며 받은 돈 만큼만 일하려는 모습.


  


  나와 밀레니엄-Z세대의 궤를 같이하는 내 동생이 언젠가 말해줬는데 요즘 미국에서는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이 유행이라고 한다. 조용한 사직이란, 실제 퇴사를 하지 않아도 마음은 일터에서 떠나 최소한의 업무만 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받은만큼만. 

'일은 당신의 삶이 아니'라고 역설하며 '당신의 가치는 당신이 하는 일의 결과물로 정의되지도 않는다'는 개념이다.


  중국에서도 아등바등 노력하지 않고 최소한의 벌이로만 생계를 유지하자는 뜻의 '탕핑주의'가 젊은층을 중심으로 유행한다고 한다. 코로나19와 맞물린 노동시장의 폐단이 단적으로 드러나 버린게 아닌가 싶은데, 일각에서는 이를두고 '근무태만'과 '의욕저하'의 다른이름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직 입사하지도 않은 회사를 두고, 미리 일찌감치 조용한 사직을 염두에두고 취업하는 젊은이들도 있는 듯해서 어쩐지 씁쓸하지만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내가 느낀 건 하나다. 권력과 안위에만 눈이 먼 일부 구성원들이 조직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면, 결국 절이 싫은 중들이 떠나가고 그렇고 그런 사람들만 남게 된다. 이른바 사내정치의 피해를 엉뚱한 사람이 보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그들이 어떤 다른 목표가 있다면 또 얘기는 달라진다. 


권력을 잡는 순간까지의 연산군은 거칠지만 균형잡힌 통치와 식견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가 강력한 왕권을 쥐고 자신을 경계할 만한 사람(신하)들이 사라진 다음부터는 망나니가 됐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연산군에게는 권력을 잡은 뒤 그 힘을 어떻게 행사할 지에 대한 청사진이 없었다.


  본인이 권력을 잡아서 조직을 어떻게 이끌겠다 하는 청사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개는 그저 본인의 안위와 어떻게 하면 일을 좀 덜하나 하는 생각뿐.


연산군 만큼이나 왕권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태종이나 세조를 보면 왕권을 잡은 뒤 최소한 '무엇을' 하겠다는 의지나 구상이 있었다. 주변 여건상 실행까지 옮기지 못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 방향과 목표만큼은 분명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왕권을 강화한 이후 거머쥔 권력으로 무엇을 이루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 권력은 개인의 복수, 개인의 쾌락을 위해서만 작동됐다.


  그런데 조직에서도 정말 간신이 나올 수 있을까?  역사에서는 그 시작과 끝이 전부 '권력'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현대 조직에서는?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와닿았던 부분은 이렇다. 그래서 여러번 문장 맨 처음으로 가서 다시 읽었다. 


7년의 전쟁기간 내내 선조의 모습이 이러했다.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만 골몰한데 대한 상징적인 결과가 바로 칠천량해전 패전이다. 이런 선조에게 원균은 장기판의 말이었을 뿐이다. 만약 역사에서 원균이 없었다면 선조는 어떻게든 또 다른 원균을 찾았을 것이다. 조선 수군에서 그 어떤 사람이 오더라도 이순신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선조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순신을 잘라내고 그 자리에 원균을 앉힌 이유는 자명하다.


  무엇 때문이었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왕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명제가 있을까? 국가를 기준으로 보자면 선조의 결정은 나라에 해악만 가져오는 무능한 판단이었지만, 선조 개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권력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판단'이었다.


  선조가 열심히 밀었던 원균은 결국 역사에 이순신과 나란히 일등공신으로 기록되기까지 했다. 권력에 눈이 먼 자들이 기록한, 그들이 말하는 '승자'의 기록은 그랬다. 


  어쩌면 전부 이미 알고있는 사실들이었지만 눈으로 확인하고 다시 나의 환경에 적용해 곱씹을수록, 어쩐지 뒷맛이 쓰다. 너무 쓰다.





이전 06화 선택에 정답은 없다, 책임만 있을 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