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연 Sep 27. 2022

선택에 정답은 없다, 책임만 있을 뿐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애거서 크리스티




  1939년 출간된 이 책은 어쩐지 올해 화제가 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을 닮았다.

아니 드라마가 책 보다 훨씬 이후에 발표된 작품이니 드라마가 책 내용을 닮았다고 하는 게 맞겠다.


  하지만 책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출간되고 난 후 수십년이 흐르면서 이를 모티브로하거나 오마주한 작품들이 수없이 많았기 때문에 나중에는 대중들이 오히려 이 책을 시시해했다는 얘기도 있다.


  나조차도, 이 책을 읽고 난 직후에 이런 내용의 독후감을 독서다이어리에 썼다.


솔직히 잘짜여진 웹툰과 웹소설까지 난무하는 요즘 시대에 이 정도 추리소설이 고전이라며 추앙받는게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만 스토리 전개는 신선했다. 인디언 노래에 맞춰진 (계획적)살인 예고라니. (그렇지만 그 노래 가사 마저도 와닿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오징어게임>에는 자의든 타의든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리고 한 명씩 죽어간다. 게다가 범인은 그 안에 있다. (독자나 시청자는 끝날 때까지 이를 눈치채기 어렵다)


  이런 특징들 외에도 매우 놀랍다고 생각한 게 하나 있다.

바로 그 게임에 참여하(게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자발적 참여를 한다는 사실이었다.

본인이 스스로 만든 불행한 운명의 수레바퀴 안으로 덤덤히 들어가는 사람들. 작가는 그런 묘사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봐, 세상에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너를 강요하지 않아. 네 운명은 네 스스로 만드는거야.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모든 게 정말 터무니없어! 한 마디로 미친 놈의 짓이야!
이 섬에 도착한 이후로-그게 언제 였더라? 이런 오늘 오후 였잖아! 그런데 웬일인지 무척 오래된 것 같았다.
'우리들이 정말 이 섬을 떠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아니, 내일 아침에 배가 오는 대로 떠날 수 있을거야.'
하지만 우습게도 그는 섬을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눈을 의심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판에, 본인의 운명도 어찌될 지 모르는 이 형국에, '섬을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니? 사람은 결국 본인 스스로에게는 관대한 걸까. 바로 다음 문장에서는 그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또 다시 걱정거리에 빠져들게되기 때문이다.
열려진 창문으로 파도가 바위에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녁 때보다도 훨씬 우렁차게 들렸다. 바람이 다시 거세지고 있었다.


  스스로 고립시켜 버리는 운명이라니.


'무척 평화로운 소리야!' 그리고 정말 평화로운 곳이란 말이야.'
섬이 좋은 이유는, 그 섬에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끝에 와 있는 것이다. 그는 갑자기 이 섬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에서도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개 삶의 끝의 순간에서 스스로 그 게임에 참가하기를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자발적으로 사지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가위바위보라는 말도 안되는 유치한 게임으로부터 시작해 점점 더 큰 판으로 발을 들이밀게 되는 그들. 어쩌면 스스로를 갉아먹는 행위들도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행동이나 생각들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참가자들에게는 한 번의 기회가 있었다. 자유로워질 수 있는. (심지어 그 판을 직접 짠 사람이 기회를 준다) 그렇게 내보내줬지만 그들은 다시 자기발로 그 판에 다시 찾아왔다. 그러고는 기꺼이 목숨을 잃었다. 일확천금의 꿈 앞에서.


  또 한 가지 책과 드라마를 보면서 소름끼쳤던 부분은, 이 게임의 판을 짠 사람은 결국 '가진자'였다는 점이다. 소설 <그리고아무도없었다> 속 섬에서 일어나는 살인행위를 계획했던 사람은 워그레이브 판사였고 드라마 속 게임을 짠 사람은 엄청난 부자였다.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고, 여유가 있었고, 자기 마음대로 사람들을 조종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갖고 있는 사람이 품는 헛된 욕망과 그릇된 이기심, 잔인함, 부도덕성이 얼마나 위험하고 또 파급력이 큰 지를 보여줬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 <프랑켄슈타인>에도 잘 드러나 있는 부분이다.

(참고로, 프랑켄슈타인이 괴물 이름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니다. 괴물을 만든 박사의 이름이다.)


  실력이 뛰어난 박사가 인류에 도움이 되고자 했다면 세기의 발명품을 탄생시켰을 테지만 박사는 사리사욕을 챙겼고 헛된 욕망과 이기심을 투영시킨 피조물을 만들어, 결국 괴물을 세상에 내놓았다.

괴물은 세상을 어지럽혔고 결국 모두의 원망과 멸시를 받은 채 힘겹게 살아가다가 스스로 사라진다.


  소설 속 모든 판을 짠 워그레이브 판사는 훗날 본인의 심리를 이렇게 복기한다.


범죄와 그에 대한 처벌은 언제나 나를 매료시켜왔다. 나는 수많은 추리소설과 괴기소설을 즐겨 읽었다. 그러는 중에 나는 나 자신의 개인적인 즐거움을 충족시키기 위해 가장 독창적으로 살인하는 방법들을 고안해 냈다.


  무엇이 그를 그런 엄청난 행위자로 이끌었을까.


그러는 과정 속에서 나는 판사가 되었다. 그것이 나의 비밀스런 본능의 또 다른 면을 자극시켰다. 피고석에서 몸부림 치고 있는 비열한 범죄자를 보는 것-그의 최후가 단계를 밟아서 천천히 다가오는 가운데. 저주받은 영혼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내게 있어서 더할 나위없는 즐거움이었다.


  


  책이나 드라마를 보면 대개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이라든가 정치인, 재벌, 지식인 등이 계획적 범죄를 저지른 뒤 결국 법의 심판을 받게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커녕 가진 자들이 휘두르는 소리없는 권력과 총성없는 전쟁이 무섭다. 나는 그런 행위를 감시할 수 있는 데 조금이라도,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기 위한 일을 업으로 하며 먹고 살고 있긴 하지만 제대로 가고 있는 지도 의문이다. 어쩔 수 없는 월급쟁이라(이것도 핑계일지 모르지만) 만성적인 태도로 삶과 직업, 소위 먹고사니즘에 골몰해 애초 세웠던 계획이나 포부의 궤도를 한참 벗어나지는 않았는지.


  반대로 '가진자'들의 영웅담을 소재로 한 작품들도 있다.

'수임료로 단 돈 천원을 받고 변론해주는 변호사'라든가, 대형 로펌에서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사람을 변호사로 채용해 함께 사건을 해결해가며 성장하는 이야기같은.



  <그리고아무도없었다>에는 승리자가 없다.

사건이 미궁 속으로 빠져버리는가 싶다가 그 전말이 드러났는데 이미 가해자인 워그레이브 판사는 죽었다.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문학작품들과 친하게 지내긴 했어도 추리소설은 잘 읽지 않았었는데 다시 찾아보게 될 것 같다. 코난 도일의 작품들을 읽거나 넷플릭스에 올라오는 추리물들을 보면서 그 안에 숨겨진 범인을 찾는 것과 그 과정 속에 얽혀있는 묘한 전개들을 파악하면서, 그것은 또 어떤 다른 삶의 의미를 찾는 행위가 될 수 있을지 지켜봐야겠다.

이전 05화 울프를 읽고나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