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이 넘어야 할 허들로 가득찬 삶의 서사
*사진은 영화 <로제타>의 스틸컷입니다.
이 책이 맞을 것 같은 분
1) 전문직 에세이를 읽어본 적이 있는 분
2) '세상이 왜 이렇게 불공평할까' 생각하는 분
3) 선의와 연대의 힘을 믿는 분
박주영, 《법정의 얼굴들》(모로, 2021)
간략한 내용 설명
-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는 것 말고는 잘하는 게 없는" 형사재판장이 쓴 책입니다. 주로 형사법정에서 겪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에세이와 르포르타주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는 책이에요.
- 피해자와 피고인, 유죄와 무죄, 구형과 형량 등으로 간단히 설명되고 마는 사람들의 자세한 서사가 기록돼 있어요. 정말 많은 부분에서 겸손해지게 되는 책입니다.
좋았던 점
- 너무 쉽게 뭔가를 판단했던 저를 반성할 수 있어요. 저는 너무 쉽게 분개하는 사람이라 세상 일들도 마찬가지로 대했거든요. 그른 건 그른 거고, 나쁜 건 나쁜 거라며 쉽게 선을 긋곤 하는데 이 책을 읽으며 선과 악, 옳고 그름이 딱 잘라 나눠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 어쩌면 사회가 외면해왔을 타인의 삶이 잘 표현되어 있어요. 나약한 인간인지라 자주 힘들어하고 불평을 쏟아내는데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얼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게 있어요. '사실 우리가 죽도록 노력해서 이뤘다고 생각한 일들이 다 먹고살만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 아니었을까?' 이 책에는 돈이 없어서 교도소에 가려는 노인, '왔니? 배고프지?'라는 말을 쉼터에 가서 처음 들어본 소년, 소풍 가고 싶다고 했다가 맞아 죽은 아이 등의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돈이 없어 죽으려는데도 돈이 필요한 아이러니한 상황까지 갔다면, 단 한 번도 세상의 환대를 받아본 적이 없다면, 소풍 가고 싶다는 말이 매를 부르는 상황에 있었다면 대학을 갈 수 있었을까요? 취업 준비를 할 수 있었을까요? 제가 지금 보일러를 틀어놓은 방에서 브런치에 책 소개를 쓸 수 있었을까요? 아니,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저는 어떤 질문에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어요.
- 선의와 희망이 넘쳐납니다. 듣기만 해도 괴롭고 고통스러운 이야기지만 그 속에 세상에 대한 선의와 사람에 대한 희망이 가득 담겨 있어요.
정서경 작가님이 드라마 <마더>에 대해 "주인공 아이의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바라보려는 노력이 내가 연대감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저는 이 말을 정말 좋아해요. 우리 눈앞에 놓인 고통과 괴로움을 끝까지 직시해야 비로소 연대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쪽이거든요.
근데 이 책도 그런 것 같아요.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법정은 온갖 악이 흘러오는 바다 같은 곳이라던데, 악에 휩쓸리지 않고 어떻게든 파도 위에 서서 세상과 사람들에게 함께 헤쳐나가자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우리가 함께라면 할 수 있다고요. 선의와 연대를 강하게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삶을 살게 하는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사족
- 개인적으로 전작인 《어떤 양형 이유》보다 더 깊고 단단해진 느낌이었어요. 둘 다 좋지만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이 책을 더 추천하고 싶어요.
- 눈물을 좀 흘리시는 편이라면 절대 사람 많은 곳에서 읽으시면 안 됩니다.. 입에 주먹만 안 넣었을 뿐 거의 오열하며 읽은 부분도 많았습니다...
좋았던 문장 하나(언제나처럼 정말 하나만 꼽기 어려웠습니다..)
긴즈버그 대법관이 한 시대를 견디며 개인이 부조리한 세상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보여줬듯, 나는 한 사회도 그런 시대를 건너가기 위한 올바른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최소한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다. 불의한 세상에서 홀로 싸우는 개인을 방치하지 않는 것, 단 한 명도 희생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제 정말 연말이 다가오고 있네요.
이 책을 통해 무방비 상태로 홀로 싸우고 있을 타인들의 삶도 생각해볼 수 있는 연말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더할 나위 없는 하루를 보낸 모든 분께, 손 번쩍 들어 인사를 보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