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by 디어메트리

'가만있기를 선택하는 것도

실은 무언가를 행하는 것만큼이나

욕망으로 가득한 일이었다.'


여름은 고작 계절 _ 김서해



퇴사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출근길에 쫓기듯 집을 나서던 매일의 아침이

이젠 나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9시에 출근하고, 12시쯤 점심을 먹고 동료들과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다시 6시까지 일하고 집에 돌아와 넷플릭스를 켜던 그 생활이 너무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루틴이 주던 안도감이 그립기도 하다.


나는 생각보다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삶에서 꽤 많은 만족을 느끼며 살았던 것 같다.

그때는 불평만 했지만, 그 안에서 '오늘도 내가 제시간에 해야 할 일을 해냈다'는

이상한 안정감이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삶을 멈췄다.

어떤 한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품어온 일들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으면서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고,

관계 속에서의 역할과 책임들도 나를 지치게 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를 의심하는 순간들도 많아졌다.

하루하루가 작은 압박처럼 쌓여,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동안은 그 모든 것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누구의 기대도, 의무도 내려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로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

그 마음이 결국 나를 멈추게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마음먹은 내가, 오히려 무언가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하느라 방치해 둔 집안을 정리하고, 노트북 안의 파일을 폴더별로 깔끔히 정돈하고,

내 시간을 어떻게 쓸지 계획을 세웠다.


루틴에서 벗어나고 싶었는 데, 또 다른 루틴을 만들고 있었다.

요즘 읽고 있는 책 '여름은 고작 계절'이라는 책의 한 문장이 지금의 나를 말하는 것 같았다.

"가만있기를 선택하는 것도, 실은 무언가를 행하는 것만큼이나 욕망으로 가득한 일이었다."


맞다. 나는 단순히 멈추고 싶은 게 아니었다.

멈춤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고 싶었다.


타인의 시간표가 아닌 내 시간표를 살고 싶다는 욕망,

'해야 하는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다시 중심에 세우고 싶다는 욕망 말이다.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말의 이면에는 아주 적극적인 의지가 숨어 있었다.

멈춤을 통해 비워내고, 비워낸 공간에 내가 원하는 것들을 다시 채워 넣으려는 욕망 말이다.


지금 나는 여전히 '가만히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 '가만히 있음'은 게으름도, 무력함도 아니다.

오히려 나를 다시 세우기 위한 아주 적극적인 움직임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지금, 나는 이 시간을 조금 더 당당하게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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