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겨 버린 고민
고민과 걱정은 날숨과 들숨처럼 들러붙어 반복된다. 어제의 후회와 내일의 걱정으로 가득 찬 머리를 짊어지고 있으면 정작 오늘 해야 할 일은 저만치 밀어져 있기 일쑤다. 딱히 해결책을 잘 찾아내는 것도 아니어서 고민은 그저 고민으로만 남을 때도 많다.
끌어안고 있는 고민은 시간을 양분 삼아 무럭무럭 자란다. 감당하기 어려운 크기가 되기 전에 어디인가 같이 들어줄 이를 찾는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 했던가. 더러는 슬픔을 나누면 슬픈 사람이 둘이 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고민이 딱 그렇다. 고민을 나누면 그 고민을 하는 사람이 둘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큰 위로가 된다. 게다가 어떤 고민은 누군가 들어주는 것 만으로 사그라들기도 한다.
오래된 친구에게, 옆자리 동료에게, 고민보따리를 풀어놓는다. 나 고민이 있어하고. 어떤 일은 조금 망설이며 말하게 된다. 내 실수나 잘못인 일이라 겸연쩍거나, 사실은 답을 알고 있으면서 빙빙 돌아가는 것이 부끄울때 특히 그렇다. 마음이 급해 두서없이 쏟아낼 때도 있다. 생각보다 앞서가는 말을 붙잡을 새도 없다. 아 이 얘기까지는 하지 말걸 하는 후회는 대게 이런 경우에 생긴다.
크기가 큰 고민이라 한참 풀어놓을 참인데 금세 나는 있잖아 하고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기도 한다. 고민을 빼앗겨버린 것이다.
하려던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붙잡아둔 채 상대의 고민을 듣다 보면, 비어있는 대화처럼 느껴진다. 주고받는 것이 아닌 서로 던지기만 하는 대화에 의미가 있을 리 없다.
남의 고민을 들어줄 여유를 가진 이가 많지 않다. 조용한 끄덕임도 괜찮다는 토닥임이나 함께해 주는 분노도 쉽게 얻기 어렵다. 모두가 제 고민이 가장 무거운 것이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 지인의 고민을 듣다가도 나도 그런 적 있는데 괜찮다며 별것 아닌 취급과 함께 경험담을 늘어놓는 일이 부지기수다. 별 일 아니니 걱정 말라는 의도였다 하더라도, 별것 아닌 일로의 취급이 도움이 될 리 없다. 뒤이어 늘어놓는 경험담도 허공에 흩어질 뿐 닿지 않을 것이다.
펼쳐 보이려다 빼앗겨버린 고민에는 다른 방책이 필요하다. 부드럽고 진득한 수프면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다. 기왕이면 달콤한 옥수수 수프가 좋겠다.
빠른 처치가 필요할 때에는 인스턴트 수프를 준비한다. 살살 봉지를 털어 가루를 담고 용기의 선까지 뜨거운 물을 붓는다. 두세 번 휘휘 저어 잠시 기다리면 완성이다. 화려한 건더기는 없지만 따듯하고 부드러움은 여전하다. 날숨에 깊은 한숨을 섞어내며 한 모금. 미처 목구멍을 빠져나가지 못한 고민이 걸쭉한 수프와 함께 내려앉는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루부터 만든다. 버터를 녹이고 밀가루를 볶는다. 덩어리가 되면 우유를 붓고 잘 풀어준다. 크림으로 풍미를 더하면 좋겠지만, 넣지 않아도 무방하다. 옥수수는 미리 볶아 갈아두어도 좋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같이 넣고 끓이다 믹서기를 사용할 참이다.
진하고 달콤한 옥수수 수프. 뭉글뭉글한 한입이 모난 고민을 감싸준다. 고민이 내려앉은 침전의 시간. 묵직한 수프와 함께했으니 다시 떠오르려면 한참이 걸릴 게다. 조금은 여유로워졌으니 빼앗는 일 없이 지인의 고민을 들어야겠다. 수프처럼 끌어안고 달콤하게 말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