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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우사랑 Dec 16. 2021

624일째 날

with. 전승환_<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준 순간>


종종 상실의 슬픔에 잠긴 사람이 웃거나 즐거운 표정을 지을 때, 우리는 ‘아, 이제 더 이상 슬프지 않구나’하고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슬픈 사람도 종종 웃을 수 있습니다. 기쁨의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로 한 사람의 슬픔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는 없습니다. 슬픈 사람에게 우리가 해줘야 하는 일은 ‘너 이제 괜찮구나? 슬프지 않구나?’하고 속단하는 게 아니라, 그저 묵묵히 곁에 있어주는 것입니다. 


전승환_<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준 순간> (p.239)




나이가 들면서 내 슬픔도 늘어가지만, 주위의 누군가의 슬픔들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예외 없이 저는 주춤거리게 됩니다.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는 매번 너무 어려운 일이고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어떤 말이라도 건네고 싶은데, 말을 통한 위로라는 건 불가능한 게 아닌가 하는 막연한 생각들로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 읽은 많은 책들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저 묵묵히 곁에 있어주면 된다고.  

오늘로 엄마가 돌아가신 지 624일이 되었습니다. 624일의 시간을 생각해 봤습니다. 비혼의 40대의 딸이 80대의 엄마를 보내는 일은 나 스스로가 나를 바라볼 때, 언젠가는 겪어야 하는 당연함이 있었기에 슬퍼하는 일도 힘들었습니다. 그만 슬퍼하자, 생각해도 어쩔 수 없이 흐르고 마는 눈물 사이에서 매일 길을 잃는 느낌이었습니다. 당위를 가진 생각과 생각을 배반하는 마음으로 지나가는 날들 속에서, 타인의 말은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상실 수업>의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가 말했던, 부정, 분노, 타협, 절망, 수용이라는 상실의 단계를 몇 바퀴쯤 돌고도 늘 제자리인 것 같은 삶을 오래 살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 문장을 읽은 날, 다른 자리에 있는 나를, 슬픔의 자리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묵묵히 옆에 있어주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 사람들이 나에게 해주었던 그 많은 말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를 바라보던 안타까운 눈길은 마음에 길이 되었습니다. 그저 밥을 함께 먹고, 웃고 떠드는 시간들을 함께 보내준 사람들로 슬픔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슬픔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내가 되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슬픈 사람에게 우리가 해줘야 하는 일이, 그저 묵묵히 곁에 있어주는 일이라는 걸, 긴 시간의 경험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위의 문장 뒤로 인용된 롤랑 바르트의 문장을 읽으면서는 마음이 조금 더 편안해졌습니다.


이런 말이 있다(마담 팡제라가 내게 하는 말):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차츰 나아지지요. 아니. 시간은 아무것도 사라지게 만들지 못한다: 시간은 그저 슬픔을 받아들이는 예민함을 차츰 사라지게 할 뿐이다. 


롤랑 바르트_<애도일기>


딱 624일의 시간만큼 엄마의 죽음에서 무뎌진 나를 봅니다. 시간은 결코 아무것도 사라지게 만들지 못하고, 그러니 슬픔도 사라지는 건 아닐 겁니다. 이제는 그걸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종종 나를 찾아오는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거겠죠. 624일이 지난 지금, 이제 저는 조금 자신이 생겼습니다. 울지 않고 '엄마'를 쓸 자신이, 미워하지 않고 '아버지'를 쓸 자신이, 매몰되지 않고 '나'를 쓸 자신이..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나처럼 슬픔을 겪는 내 주위의 사람들 옆에 꼭 붙어 묵묵히 함께 슬픔을 견뎌줄 겁니다. 받았던 모든 사랑의 눈길을 이제 돌려줄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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