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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우사랑 Jan 05. 2022

어떤 사람이 되려는 마음

with. 고레에다 히로카즈, 사노 아키라_<태풍이 지나가고>


“아빠는 뭐가 되고 싶었어?”

‘공무원’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되고 싶었던 대로 됐어?”라고 신고가 덧붙여 묻는다.

소설가가 되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 소설가라고 할 수 있을까? 십오 년이나 글을 쓰지 못한 소설가.

“아빠는 아직, 되지 못했어. 그래도 말이야, 됐는지 되지 못했는지는 문제가 아니야. 중요한 것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지.” 


고레에다 히로카즈, 사노 아키라_<태풍이 지나가고> (p.190)




주인공은 십오 년째 글을 쓰지 못하고 있지만, 한때 신인상을 받기도 했던 소설가입니다. 생계유지를 위해 탐정 일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생활이 잘 굴러갈 만큼도 아닙니다. 게다가 부친을 닮아 도박에도 빠져있는 주인공은 늘 궁핍하기만 합니다. 이혼 한 주인공은 한 달에 한 번 아들과 만나는 날에도 역시 빈 주머니를 걱정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언제 그렇게 자랐는지 부쩍 어른스러워져 아빠에게 '뭐가 되고 싶었는지'를 묻습니다. 


어른들은 이런 순간에 당황하지 않나요? 저만 그런가요? 부쩍 자라 버린 아이의 질문은 질문 자체로 당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질문의 내용보다는 주인공의 대답 때문인지 한참 동안 마음이 짠했습니다. 안쓰러우면서 따뜻하기도 하면서. 그러다 맥락도 없이 문득 평소 마음에 들지 않던 저 스스로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이 수줍음이 많아서이기도 하고, 말이 주는 상처에 민감하기도 해서라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여러 사람이 모여 서로의 말들을 쏟아낼 때는 나의 말을 하기보다는 듣는 일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제 모습이 좋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 답답하기도 합니다. 때로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 갑자기 날아든 질문에 재치를 섞어 분위기를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자책, 마음과는 다른 말을 뱉어 놓고 그로 인해 찾아오는 불면의 밤 같은 것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조금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나도 내가 답답한 순간이 많은데 나에게 어떤 말을 바라는 타인에게 나는 얼마나 우유부단하고 답답해 보일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 돌아오는 밤길이 쓸쓸해지기도 합니다. 


자책의 밤들에는 이런 변명을 하기도 합니다. 상대를 답답하게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는 거라고. 말하기보다 듣는 일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 거라고. 그런데 가만히 듣고만 있다 보면 듣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는 좀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불면의 시간에 하는 것은 타인과의 마음의 속도를 맞춰봐야지 하는 다짐입니다. 적절한 타이밍에 나를 내어 보이려는 노력, 위트 있는 대답으로 웃음을 주려는 노력, 배려 담긴 행동으로 진심을 전하려는 노력 같은 것들. 그런 어떤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합니다. 다만 저는 아직 충분히 그런 사람은 되지 못했을 뿐입니다.


장혜령 작가님은 <사랑의 잔상들>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 그것은 반대로 생각해보면 오고 있는 중이라는 말이기도 하다고아주 느리게 당신에게 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고그러니 저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직 되지 못했다는 것. 그것은 되어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주 느리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아직이라는 단어가 그런 희망을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생각만 많은 답답한 아이로 살았고, 노력과 상관없이 또 그렇게 살아질 수도 있는 게 사람이고 인생이겠지만, 그래도 '아직' 도달하지 못했을 뿐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혹시 끝내 '아직' '이미'로 바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또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 속의 주인공처럼 어떤 사람이 되려는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 중요한 것은 그런 마음의 존재 자체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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