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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우사랑 Jan 03. 2022

아빠를 기억하는 방식

with. 고수리_<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


미움을 품고 사는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워해본 사람은 안다. 다른 사람을 지독히 미워하느라 정작 자신을 사랑할 여유가 없다. 나는 오랫동안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다. 돌아보면 안타깝고 가여운 시간이었다. 


고수리 에세이_<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 




어떤 문장은 내성도 생기지 않아 내게 오면 며칠 나를 좀 힘들게 한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문장이 있다면 그럴수록 그 문장에 오래 머물러야 한다고. 왜 나를 힘들게 하는지, 왜 자꾸 생각하게 되는지. 그 순간, 나는 나와의 깊은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민이나 슬픔이 늘 '엄마'였다면, 미움이라는 단어는 항상 내게 '아빠'였다. 세상 어떤 부녀라고 그렇게 살가운 사이일까 하는 생각도 하지만, 요즘 아버지들은 시대에 발맞춰 많이 변화하기도 하더라. 그래서인지 길거리에서, 카페에서 다정한 부녀를 마주칠 때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절망을 느끼곤 한다.


순도 높은 미움의 색에 절망의 색이 자꾸 섞여가는 이유는 아마도 이젠 미워할 대상마저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2016년 11월, 아빠는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엄마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떠나버린 아빠를 많이 원망했고, 또 그게 전부는 아닌 복잡한 마음을 안고 2020년 4월에 돌아가셨다. 두 분을 보내고 나는 오래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장례의 모든 과정을 지켜본 게 부모님이 처음이었고 유일했다. 한 인간 존재의 소멸 과정이 내 가족의 경험으로 온다는 건, 아픈 마음으로 누군가의 장례식장에서 절 두 번 하는 일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소멸, 그 모든 과정의 끝에서 나는 아득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제 끝난 거구나. 지긋지긋했던 내 미움의 역사도, 저 불길과 함께 재가 되겠구나'.


아-, 인간은, 아니 나는 이렇게나 멍청하다. 좋은 감정도 감정이고 미운 감정도 감정이다. 그 성격은 조금 다르겠지만 강렬하게 남는 쪽은, 지독한 후회를 가져오는 쪽은 오히려 미운 감정이 아닐까. 내 미움은 그 뜨거운 불길로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대상이 사라진 미움은 검은색 물감이 흰색 물감을 만나 천천히 회색이 되어가듯 천천히 계속 제 색을 품고 옅어져 갔다. 하지만 이제 알 것 같다. 흰색을 끝없이 섞어도 투명해지지도 완전한 흰색이 될 수도 없을 거라는 걸. 희미해진 내 감정도 내 쪽의 일방적인 생각만으로는 끝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흰색을 넘어 투명해지려는 노력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느라 정작 나 자신을 사랑할 여유가 없었던 나에게 주어야 하는 시간일 테니까. 그런 과정들 없이 나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때때로 이런 문장을 만나면 조금씩 절망도 섞어보고, 화해도 열심히 섞어본다. 하지만 그런다고 내 안의 미움이 떠날 거라는 생각은 또 들지가 않는다. 아직은 그렇다. 그 사실이 꽤나 절망스럽지만 너무 애쓰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자, 생각도 한다. 내 노력으로 만들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람의 일이나 감정은 예고 없이 내리는 소나기나 함박눈처럼 그냥 오기도 하는 거니까.  

'미움'을 안고라도 기억하는 게 좋은 걸까. 상처로 기억하기보단 기억이 사라지는 게 나은 걸까.  

끝없이 미워했던 일이 좋은 감정일 수는 없겠지만, 여전히 미움의 감정으로 아빠를 기억하는 일이 철없고 미안한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보면 앞으로도 계속 미워할지는 나조차도 모르는 일이고, 지금 현재는 이런 감정이 그래도 아빠를 기억하게는 하니까. 그러니까 내가 때때로 애쓰는 어떤 마음들과는 별개로 현재, 오늘, 지금 이 순간 사라지지 못한 내 안의 이 미워하는 마음도 '괜찮다'라고 생각한다. 


지나고 보면 기억은 모두 소중하다. 아무리 아팠던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그 날카로움이 무뎌지기 마련이고, 단단한 아스팔트 틈새에서도 꽃이 피듯 그 상처의 틈을 뚫고 나도 그만큼 성장했으리라 믿는다. 다시 한번, '미움'을 안고라도 기억하는 게 좋은 걸까. 상처로 기억하기보단 기억이 사라지는 게 나은 걸까.


나는 기꺼이 '미움'을 끌어안고 기억을 선택하고 싶다. 그것이 내가 아빠를 기억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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