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술술 읽히면서 제일 더디게 페이지를 넘겨야 했다. 한 문장 한 장면에서 느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천천히, 숨과 함께 시선도 고르며 소화시켜야 했다.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사랑이 등장한다. 사랑에 대해 머리를 두들겨 맞다가 결국 숨을 몰아쉬게 되는 책이라고 요약하리. 읽고 있으면 무엇을 사랑이라고 부를 것인지, 어떻게 사랑해야 진짜 사랑하는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책에는 이른바 가진 자들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모두 소위 '보잘것없다'라고 혀를 찰 만한 삶을 사는 인물들만 있을 뿐이다. 그들은 모두가 꺼려할 만한 것들을 경험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고 먹고 마시며 노동한다. 그리고 그런 삶은 현실에서 너무도 쉽게 동정받는다. 삶에서 겪을 불행의 양이 최대치일 거라고 누구나 단정 짓고, 그것은 죄책감 없이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그네들의 삶이 불쌍하다고 말하면서, 책에서 매춘부와 불법 이주민 등으로 비치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범법자들의 삶에는 '무엇이 당신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를 알기 위한 안경을 끼지 못하고 비판의 현미경을 먼저 들이댄다.
누가 책을 읽으며 감히 그들을 불쌍하다고 동정할 것인가. 그전에 동정할 자격은 있는지? 그들은 그 엉망 대잔치인 삶 속에서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고 나름의 방법으로 상대를 배려하며 살아간다. 있는 그대로 서로를 받아들일 줄 안다. 선입견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꺼려하는 대신 직관으로 자기 앞에 놓인 생을, 사람을,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고 연대한다. 오히려 그들을 세상의 구석으로 내몬 것은 이른바 가진 자들이다. 보호라는 명목 하에 오히려 그들이 삶을 꾸린 환경마저 헝클어놓는다. 현실의 가장 바닥에서 사는 사람들의 행복마저 보호와 관심이라는 따스해 보이는 현실로 박탈해간다. 아마 그들에게는 가진 자들이 범법자가 아닐까.
주인공 모모는 말했다. 로자 아주머니를 너무 사랑하니 그녀가 원하는 대로 병든 그녀를 죽여줘야 한다고. 의사는 그에게 무슨 끔찍한 소리냐며 반박하고, 모모는 결국 그녀를 병원으로 보내는 대신 그녀가 원하는 모습으로 가장 편안하게 여기던 곳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안락사 문제가 떠올랐다. 나는 어떻게 생각했었지. 내게는 열네 살짜리 매춘부 아들의 입을 빌려 나온 이 메시지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방법이라고 느껴지는데.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 규율과 규칙을 지켜야 하는 것은 지당하나, 그렇다고 해서 가장 밑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삶을 지워서는 안 된다. 불법이라는 두 글자가 비판의 합당한 이유가 되지 않을 때도 있다. 함부로 손가락질을 하거나 혀를 차기 전에 그들의 삶에서 내가 더 가진 것은 무엇인지, 덜 가진 것은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예수가 그랬었지, 단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자만이 이 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돌이 아닌 사랑으로 치환해도 문장은 성립하지 않을까. 어느 누가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지 않고 함부로 사랑하고 함부로 동정하며 함부로 비난할 수 있는지? 보호와 관심 교화, 우리가 사랑이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그들에게 행하는 것들이 인류애를 실천하는 방법이 맞는지? 그리고 그것을 인류애로, 과연 사랑이라고 불러도 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