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사랑 시

by 유경

당신이 틔운 연정의 첫 순은 3년 전 어느 새벽, 힘찬 날갯짓에 못 이겨 떨어지는 새의 깃털처럼 그렇게 내게 왔다. 글 참 잘 쓰시는 것 같아요, 많이 배워갑니다. 특이한 당신의 계정을 몇 번 살펴보았던 기억이 난다. 어떤 생각으로 계정을 이렇게 지었을까? 물어보고 싶었으나 물어보면 선을 넘어가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스물두 살의 갈색 머리 여대생은 팬레터를 받아서 기분이 좋았고, 그 후로도 꾸준히 글을 썼다. 이따금 재능에 대한 원망이 들 때마다 꺼내보곤 하던 응원의 메시지들 중에는 당신의 것도 있었다. 당신과 내가 닿았던 그 짧은 순간을 나는 그 후로도 여러 번 다시 회고했던 셈이다. 맞아, 당신이 접속 중이면 기분이 괜히 이상했었다.


시간은 삶을 업고 숨차게 달렸고, 언제나 동그마니 예쁠 것 같던 시선도 게슴츠레 흐려지기 시작했다. 총기를 담고 세상을 또렷하게 마주하기보다는 체념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까는 게 편한 사회인 1이 된 이후, 정말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이따금 꺼내보던 수많은 응원의 메시지들도 자연히 꺼내볼 수 없게 되었다. 죄책감이 들었다.


죽어야겠다. 죽을 수 있겠어. 어느 날 아침엔가는 죽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인생에 확신이 들었던 적이 다섯 손가락으로 전부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는데, 그날은 머리에 끼어 있던 안개가 순식간에 걷히는 기분이었다. 한 번도 행복한 적 없었던 내 삶의 이유가 그저 내가 숨 쉬고 있기 때문이라는 확신이 든 순간, 어떻게 마지막을 설계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랑을 비롯한 삶 속의 수많은 선택에 있어서 매번 하는 실패였고 매번 예감하는 실패지만 익숙해지기는 커녕 늘 새롭게 앓아야 했다. 거듭될수록 더 심하게 좌절하게 되었고 더 많이 울게 되었다.


생명수라도 된 것처럼 몸에 알코올을 때려박으며 차일피일 생의 종지부를 미루던 그즈음의 어느 날 밤이었다. 당신은 우연히 다시 내 삶을 두드렸다. 얘, 너 잘 있는 거 맞니? 를 내포한 다정한 문장들을 여러 개 들고. 여전히 아주 예쁜 글을 쓰고 계시네요. 하는 당신의 말을 들은 순간 물어보고 싶었다. 내가 살아가며 남긴 흔적들이 당신에게 영향을 주었나요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는 아닌 거죠 어딘가 마땅히 허물어진 채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은 아닌 거죠 내가, 하고 질척이며 울고 위로받고 확인받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스물두 살짜리 대학생이 아니었고, 낮은 자존감을 내보이는 것은 사람에게 독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했다. 나보다 훨씬 행복하길 바라요. 진심 백 퍼센트를 담은 말이었다. 나는 곧 사라져 버릴 거니까. 하는 마지막 말은 묵음으로 삼켰다.


첫 만남부터 애처럼 꺼이꺼이 우는 나를 당신은 난처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 사람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당신의 두 눈가에 티 나게 걸려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신이 당황할 걸 알면서도 나는 이기적으로 있는 힘껏 울었다. 변명을 얹자면 정말 괴로웠으니까. 그렇게 안 하면 내가 펑 터져버릴 것 같았으니까. 사실 아무렴 상관없었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일랑 없었거든 그땐. 그런데 이상하지, 그러게 기분이 이상했다. 내 예상을 빗나가는 당신의 다정함이 참 이상했다. 나는 지금 예쁘지도 않고 친절하지도 않지. 오히려 민폐를 끼치고 있는데 너 왜 나를 손가락질하지 않니? 왜 그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거야? 날것의 모습으로 진상을 떠는 내 옆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네가 고마우면서도 싫었다. 악에 받혀 소리 지르며 악을 쓰는데, 주변 눈치를 보기는커녕 조용히 등을 쓸어주는 당신이 좋으면서 싫었다. 춥다며 목도리를 둘러주려는 서툰 위로가 괜히 마음에 안 들다가, 또 고작 그거에 울컥하는 내가 우습기도 했다. 더 위로해줘, 와 동정하지 마, 하는 양립되는 마음. 나는 그 이후로 쭉, 당신을 맘에 들였다가 순식간에 쫓아내고를 반복했다. 그러지 말란 말이야. 나는 멍청해서 누군가의 진심을 믿고 싶어 진단 말이야, 속는 셈 치고 다시 곁을 줘볼까, 싶어 진단 말이야. 결국 다시 내 몫으로 내팽개치고 도망칠 거라면 애초에 아무것도 건네지 말란 말이야. 얼떨결에 영문도 모르고 자꾸 내쳐진 당신에게는 미안하지만, 그전에 나부터도 스스로 수백 번 마음을 담금질했다는 걸 알까.


어느 날 새벽이었다. 네가 좋아, 그래서 내가 망가지는 거야. 알아? 나 사실 진짜 별로인 인간이야. 하는 내 철없는 징징거림을 당신은 놀랍도록 깔끔하게 정리시켰다. 알아. 안다는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가, 신기하게 눈물이 났다. 바라지도 않는 거 채우려고 하지 마, 난 그냥 지금의 네가 좋아. 그 시니컬한 다정함이 대책 없는 위로보다 열 배쯤 더 당신을 신뢰하게 만들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이 사람이라면 기꺼이 한 번 더 속아봐도 되지 않을까. 이런 사람이라면, 한 번 더 울게 되어도 나름 괜찮겠다. 어떤 관계든 마음을 열 때마다 항상 최악을 상정하던 나는, 너와 맞을 최악은 최악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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