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녁
산책 나간 언니가 떡 좋아하는 나를 위해 떡을 사다 놨건만 오늘따라 일이 많다. 아예 야근할 마음으로 왔다면 이렇게 조급하지는 않을 텐데 집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부아가 치민다.
결국 떡은 포기했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다 배가 고파 편의점에 들렀다. 딱히 뭐가 먹고 싶은 건 아닌데 이대로 한 시간 내내 서 있을 기운이 없다. 뭘 먹을까 하다 삼각 김밥을 골랐다. 전주비빔밥. 그나마 내가 좋아하는 맛이다.
근 4년 만,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되었나.
처음 '삼각 김밥'이라는 걸 먹어 본 건 중학생 때. 언니 따라 콘서트에 갔다가 기차역에서 노숙한 적이 있다. 키 높이 운동화를 신고도 열심히 달렸건만 차를 놓쳤다. 지방 살던 우리는 서울 지리를 잘 몰랐고 그날 탄 지하철은 난생처음 타본 거였다.
2월의 서울. 밤은 너무 추웠고 갈 곳이 없었다. 첫차 시간까지 무얼 할까 하다 편의점에 들어가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는 어묵국과 삼각 김밥을 샀다. 그 날 먹은 어묵은 더럽게 맛이 없었다. 그러나 삼각 김밥. 그걸 먹어본 게 못내 뿌듯했다.
지난 명절 작은 아빠와 언니가 나눈 대화가 기억났다. 그때 삼각 김밥이 한창 유행이었는지 시골에서까지 그 얘기를 하고 있었다. 도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언니는 우리 중 유일한 삼각 김밥 유경험자였다. 맞장구 칠 수 있다는 게 세련되어 보였고 둘이 신나게 얘기하는 동안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잘 뜯으려 해도 늘 실패한다느니 가장자리에 남은 김이 아까워 비닐을 다 뜯어서라도 빼먹는다느니 하는 말을 들으며 이해해보려고 애를 썼다. 아는 척도 할 수 없고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낯선 음식.
말로만 듣던 삼각 김밥을 처음 먹어 본 순간, 딱히 맛있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냉장고에 오래 넣어둔 김이 이렇게 바삭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드디어 나도 먹어봤다'라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그 후로는 먹을 기회가 없었다.
두 번째 삼각 김밥은 고등학교 때였다. 나는 더 큰 세상을 맛보기 위해 시골 밖으로 나왔다. 친구 어머님 따라 간 KFC는 내가 처음 가보는 곳이었고, 친구들이 '후라이드는 어디가 맛있어, 닭강정은 여기가 최고야'하며 치킨 배틀을 할 때 나는 그만 할 말이 없었다.
우리 동네에는 그런 프랜차이즈 가게가 없었다. 내 친구네 분식집, 엄마 친구가 하는 노래방, 누구네 아빠가 하는 중국집, 사십 분 버스 타고 나가면 먹을 수 있는 돈가스집. 집집마다 같은 작물은 키워도 같은 메뉴를 취급하는 식당은 많지 않았다. 그때의 고민은 '내 친구네가 하는 중국집에 갈 것이냐, 아니면 아빠 친구 분이 하는 집에 갈 거냐'하는 정도였다. 중국집이 그나마 두 곳 있었으므로.
그러다 도시에 나가니 맛있는 것 천지였다. 친구들 따라 햄버거를 먹으러 다녔고, 야자 끝나는 시간에 맞춰 피자며 치킨을 시켰다. 저녁밥을 먹고도 학교 앞 토스트 가게에 들렀다. 살찔 것에 대비해 하복 상의를 두 사이즈씩 맞추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루는 물 마시러 복도로 나왔다가 오늘 도저히 집중이 안 돼서 짜증 난다는 친구와 함께 기숙사를 탈출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당시 그렇게 먹고도 몸이 가벼웠던 우리는 기숙사 3층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고 지붕인지 담인지 모를 것을 밟으며 기숙사 식당 쪽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너무나도 간단히 밖으로 나왔다.
생애 첫 일탈이었다. 그날 딱히 공부하기 싫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나 물 뜨러 왔다가 뭐해?’하는 당혹감이 먼저 들었다. 새로 룸메이트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가 친한 건가 싶을 만한 사이. 하지만 그날따라 정말 우울해 보였던 친구의 기분을 풀어 주고 싶었다.
야자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기숙사 출입문이 열릴 테니 그때 들어가면 된다는 친구의 계획에 따라 우리의 발걸음은 점점 학교와 멀어졌다. 이렇게 나오니까 좋다며 한참을 떠들다 들른 곳은 편의점. 그리고 사 먹은 것이 고작 컵라면과 삼각 김밥 하나. 겨우 이런 거 먹으러 나왔나 싶을 만큼 허무한 외출이었지만 그날의 기분, 그때의 분위기는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본래 삼각 김밥은 내 취향이 아니다. 밥에 간도 잘 안 되어 있어, 속도 부실해, 포장 뜯고 정리하는 것도 번거로워, 거기다 김가루까지 날리면 처치곤란. 성격 급하고 털털한 나와는 맞지 않는 음식이다. 대학 다니면서도 삼각김밥 대신 편의점 김밥을 더 자주 사 먹었었다.
그러나 오늘은 이게 눈에 들어왔다. 배는 고픈데 딱히 먹고픈 건 없고 각 잡고 먹자니 부담스럽고 집에도 얼른 가고 싶어 삼각 김밥을 골랐다. 조심해서 뜯어도 김가루가 떨어졌다. 오늘은 기운 없으니 모서리에 붙은 김도 포기. 쓰레기통에 포장지를 집어넣고 밖으로 나왔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며 밥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분주한 서울 한 복판에서 엉망으로 뜯은 삼각김밥을 우걱우걱 씹고 있자니 감회가 새롭다. 아주 바쁜 직장인이 된 듯한 기분이다. 현실은 지하철에 앉을자리 나기만 하면 곯아떨어질 피곤한 노동자. 하루가 또 이렇게 저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