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에서 산다는 것은
집 뒤에 넓은 밭이 펼쳐져 있다. 주택으로 이사 온 이듬해 그 밭주인으로부터 몇 고랑을 부치기로 했다. 전원의 삶을 만끽해 볼 요량으로 시작했다. 길이 15미터쯤 되는 밭 네 고랑에 감자, 고구마, 상추, 고추, 케일 등을 심었다.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며 주말을 이용해 밭을 가꿨다.
작은 밭이어도 농사짓는 데는 비용이 제법 들어간다. 묘도 사야 하고 호미며 농기구, 지주대, 약간의 영양제나 소량의 비료도 필요하다. 거기에 내 품삯을 고려하면 사먹는 게 싸게 먹힐 것 같았다. 호미질을 하며 만지는 흙의 촉감이 좋았다. 호미질할 때 종종 지렁이가 꿈틀거리며 통통한 몸을 드러냈다. 땅의 살아있는 기운이 느껴졌다. 잘린 뿌리며 미처 수확되지 않은 지난해의 결실들도 이따금 보였다.
대개 계분비료를 준비하는 것으로부터 한해 밭농사가 시작된다. 2월 중순쯤이면 각 집마다 수량을 파악해서 주문한 비료 포대를 받아 쌓아 둔다. 그리고 3월 경 밭을 전체적으로 한번 뒤집어 계분을 골고루 뿌려준다. 이 무렵 차를 타고 가다가 맡게 되는 꼬리한 향이 바로 그 냄새다. 밭에 길러질 작물들을 위해 양분을 미리 보충해주는 것이다.
기대했던 대로 하절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작물들은 풍성하게 자라기 시작했다. 주말농장도 해본 적이 없는 우리 도시 것들에게 긴 밭고랑 네 개는 농사에 가까운 일이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헝클어진 머리처럼 마구 자라는 덩굴줄기들을 솎아주기도 하고 김매기도 해야 한다. 잠깐 게으름을 피우거나 주말에 장거리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밭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었다.
그 여름 아침도 밭에서 김매기를 하고 있었다. "부지런도하오, 우타 이렇게 아침에 밭일을 하고 있소" 수건 두른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지나가며 동네 아주머니들이 칭찬을 한다. 그게 놀리는 말인 줄은 후에 알게 되었다. 그녀들은 동틀 무렵 밭에 나가 벌써 밭일을 마치고 아침 준비를 하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뜨거워지기 전에 손 빠르게 밭일을 끝낸 것이다. 둘러보니 밭에서 그 시간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건 나뿐이었다.
촌에서 맞이하는 밤은 길고 깊다. 아기 울음 같은 고라니 소리와 풀벌레 소리들만이 어두움의 기척을 알린다. 논이나 작은 물길이 있는 곳은 맹꽁이나 개구리들의 합창소리도 질리도록 들을 수 있다. 촌사람들은 일찍 잠이 든다. 대게 어둑해지면 저녁을 먹고 동이 트면 하루를 시작한다. 시간으로 보면 대략 10시 이전에는 대부분의 시골집들은 불이 꺼진다. 그래야 아침에 땀 흘리지 않고 농사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골에서의 하루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원래 아침형 인간이었을 것 같다. 자연의 운행에 맞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에 오랜 시간 적응되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외가에서 호롱불을 처음 보았다. 읍내에서 떨어진 촌에는 아직 전기가 귀한 곳이 많았던 때였다. 호롱불 아래서 책을 펴놓고 사촌 형과 방학숙제를 하곤 했었다. 그런 말 조차도 없었지만 그런 환경에서 올빼미형 인간으로 산다는 건 불가능했다.
우여곡절 끝에 수확철을 맞았다. 농사일도 작은 것 하나까지 요령이 필요했다. 감자를 캐는 것도 그랬다. 생각없이 호미질을 하면 호미 날에 감자가 상한다. 상한 감자는 장기간 저장하기 어렵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호미질을 해야 한다. 게으른 농사였음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수확을 보면서 땅의 축복을 느꼈다. 씨앗을 품어 이렇게 넉넉하게 키워내는 자연의 힘은 신비라고 밖에 표현할 말이 없었다.
수확한 감자를 처치하는 것도 일이었다. 부모님들과 지인들에게 나눠주었다. 지난여름 밭에서 흘린 땀이 생각났다. 시골 사는 이모가 쌀이며 콩이며 조금씩 보내줄 때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하며 이해가 되었다. 한사코 안 받으시려는 걸 얼마라도 돈을 보내 사례를 했지만 피상적인 감사인사였다. 내가 지은 감자를 보내보니 돈보다 내 수고를 위로받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듬해부터 나는 농사를 더 이상 짓지 않기로 했다. 밭주인한테도 미안하기도 하고 계속 잘할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경건한 마음으로 감사를 담아 사서 먹기로 했다. 한 해 밭농사는 내게 많은 걸 가르쳐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