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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쟁 Mar 25. 2022

승무원의 인상

승무원의 자격

 


 백화점에 립스틱을 사러 갔을 때 많이 듣는 말이 있다. "학교 선생님이세요?" 대학 다닐 때 소개팅을 나가면 전공을 밝히지 않았을 때 주로 듣는 말이 있었다. "무용과?" 소개해준 사람은 나를 한복이 잘 어울릴 것 같은 외모라고 했단다. 한국 무용하냐고 묻는다. 친한 사람과 이야기하다 내 첫인상을 조심스럽게 꺼내는 말은 한결같다. "새침할 줄 알았어." 다 틀렸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니지만 생겨먹은 것은 그런 것 같다. 무용과 같단 말도 듣기 좋았고 (어느샌가 아줌마 소리가 더 익숙한 지 오래라서 더 그립다) 새침할 것 같단 말도 하도 들어서 가끔 무리 중에 혼자이고 싶은 날엔 교묘하게 인상을 이용해서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휴식을 즐기기도 한다. 비행하는 동안엔 승무원이라고 하면 하나같이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어쩐지..."그 뒤에 나오는 말들은 듣기 좋은 칭찬 일색이지만 (여기서 내 사진을 증명으로 내놓으라고 할 독자분들이 계실 줄 안다) 앞서 내가 들어온 말들과 이 반응을 조합해볼 때 우리나라에선 승무원에 대한 이미지가 정형화되어있단 것을 추측해본다.

 정작 내가 승무원으로 일하면서 외국항공사였던 직장에선 나처럼 생긴 사람이 없었다. 다인종 다민족 회사이기도 했지만 한국 국적의 승무원들만 모아 보더라도 학교 선생님 같거나 한국 무용하게 생겼거나 새침하게 생긴 사람은 드물었다. 그보다는 어떤 특정 타입의 외모가 더 많았다고도 하기 어렵다. 나는 해변에서 주운 알록달록한 조개, 소라 껍데기, 각양각색의 돌들을 손에 한 움큼 모아 펴보곤 말하곤 했다. 꼭 우리 회사 승무원들 같다. 한때 그림 그리는 것이 직업이길 바랐던 나는 종종 우리 회사 승무원들의 얼굴을 그렸었다. 광대가 여기 있고 코 끝이 둥그렇고 뾰족하고 이런 것들로는 승무원이라는 직업을 특징 잡을 수 없다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오히려 내가 발견한 승무원의 인상 중엔 다른 것들이 있었다. 주로 외형적인 것 말고 하는 짓, 우리끼리만 느껴지는 '승무원 job특' 중에 몇 가지만 적어본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문을 잡아준다. 나도 모르게 눈인사라도 먼저 한다. 직업병에 가까운 안내병은 내가 외지인인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조차 발동해서 나도 모르게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보면 도와줄까, 하고 나도 모르는 길을 같이 찾아 나선 적도 있다. (이런 나를 보고 새침하다니 억울하지 않았겠나.) 다른 항공사에 승객으로 탔을 때 화장실을 쓰고 나올 때 정리를 싹 해두고 화장실 휴지로 일등석 스타일의 휴지 접기를 하고 나오질 않나, 나오면서 두리번대는 다른 승객에게 정중한 손 제스처로 빈칸을 안내하질 않나, 그러나 같은 승무원끼린 너무 익숙한 장면이라서 그 항공사 승무원조차 내 행동의 어색함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님 너무 처철해서 눈감아줬거나.


 다른 한 가지의 승무원 특징은 외모 치장이다. 써놓고 보니 대단한 것 같지만 결론적으로 승무원들은 옷매무새나 화장에 신경을 쓰는 편인 것 같다. 두바이 한인교회에서 하는 일주일간의 특별 새벽기도를 참석한 적이 있었다. 새벽 4-5시에 기상해서 나와야 하는 스케줄이지만 승무원들에겐 그 시간 기상이 별거겠나, 일주일을 내리 자리 지킨 사람들 중엔 오프 거나 결항으로 비행이 없어진 승무원들이 많았다. 한결같이 비비크림이라도 바르고 립스틱이나 마스카라까지 한 상태로 자리에 있었다. 누군가는 외모 치장에 상당히 열 올리는 20대 여자들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끼린 안다. 우리의 화장은 그저 직업에서 파생된 덧없는 습관이었음을, 집 앞 마트에 나가더라도 구색을 맞춘 옷과 차림새를 좋아하는 것은 누가 볼까 봐서가 아니라 서비스직 중에서도 단정한 외모로 신뢰를 줘야 하는 직업 특성이 계발해낸 특기 같은 것이다. 그렇게 승무원 직업은 남동생 티셔츠까지 뺏어 입던 내 본래 성향까지 바꿔놓았다. 사각이 그렇게 편하냐며 남동생 팬티까지 집어 들기 시작할 시점에 승무원으로 취업이 된 것은 참으로 신의 한 수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비행을 그만둔 뒤에 남편이 안 입는 사각팬티를 입어보곤 그 훌렁하고 허전한 느낌에 질겁하고 바로 벗어던진 이력이 있다.) 남자 승무원들 중엔 나보다 더 눈썹을 잘 다듬고 피부 미용에 부지런한 사람도 여럿 봤다. 내 뭉개진 마스카라를 보고 마스카라 바꿔야겠다고 하거나 립스틱이 내 퍼스널컬러와 안맞는것 같다고 조언도 해준다. 남자 승무원 중에 친한 경우엔 등살 빼는 운동 알려줄까, 하고 묻지도 않은 운동을 강요받는 경우도 있다. 성희롱이 아니다. 절대적으로 신뢰할만한, 언니아닌 오빠들의 다소 정확한 조언을 듣는 것이 우리 업계(?)에서는 흔한 일이다.


 승무원의 다른 특징 한 가지는 뭘 잘 사고 잘 판다. 세계 방방곡곡의 슈퍼와 가게 문턱을 자주 드나들어본 승무원들은 물건의 품질, 가격을 평정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그리고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많이 사보고 면세 판매를 주구 장장 하다 보면 뭘 파는 것에도 어느 정도 능력이라 할 수 있는 기술이 생긴다. 어느 여름 무료함을 달래려 집안의 집기들을 중고장터에 팔아서 월 100만 원 이상의 수익을 올렸던 장본인은 집에 굴러다니던 돌멩이도 그 때깔과 오묘한 광채로 인해 미켈란젤로가 고른 대리석으로 팔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왜 집에 돌이 있었는지는....) 취항지 중에 유독 도시와 멀고 교통이 안 좋아서 호텔이나 길 건너 마트 밖엔 갈 곳이 없는 곳들이 있다. 마트에 들어서면 동남아의 후덥지근한 날씨에 반팔 반바지 차림인데도 어디서 나름 스카프로 멋을 내거나 팔찌라도 찰랑거리며 마트의 아보카도부터 밀짚모자까지 다 만져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러다가 지나가는 행인과 눈인사도 하고 서로의 장바구니 속 물건을 보여주며 친밀함을 형성하는 기이한 장보기를 하는 자가 있다면 십중팔구 같이 비행기 타고 온 동료다.


 어떤 특정 직업군의 인상이란 것은 마땅히 그 직업이 해냈으면 하고 바라는 우리의 이상을 그려낸 것과도 같다. 한국에서의 승무원이라고 하면 그려지는 이미지는 어쩌면 시골 학교의 선생님같이 편안하면서도 절도 있는 지도를 해주며 무용하는 사람처럼 날렵하고 가벼운 몸동작을 구사하고 위급 시엔 도도하면서도 강단 있는 선택을 내릴 수 '있어 보이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식의 표현이라면 맞다, 비행하는 동안 나 그런 사람이고 싶었다.


승무원이 되려면 어떤 자격증이 필요할까, 아마 취준생들이 물어오는 많은 질문중 하나다. 이미 승무원이 된 사람들은 어떤 자격이 필요할지 더이상 고민하지도 돌아보지도 않지만 어떤 인격이 되어야할진 오래 고민하기 마련인것 같다. 나이가 들고 특정 분야에 경력이 쌓일수록 인상은 인격에서 비롯한다. 승무원 하다가 이직을 하는 경우 재취업율이 높은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람을 상대하고 예상치못한 일에 대처하는 주요 업무로 비롯된 훈련의 결과로 인상이 좋아지기 때문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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