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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예정 Jan 21. 2020

방                            학

v a c a t i o n



방학을 했다. 드디어 종강을 했다. 사실 몇 주 전에 했지만, 종강을 만끽하느라 이제야 타자기 앞에 앉았다. 한 학기 중 절반 가량의 시간은 철도 위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시간은 또 나뉜다. 학교에서의 시간과 나의 시간으로.



나의 시간


학기 중 나의 시간은 현저히 부족했다. 많은 것을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을 해 보면, 마음에 와 닿는 일은 없었다. 과제를 끝내고 나면, 시간이 조금 남았다. 그 시간은 잠을 자기 바빴다. 주말이 되면 나는 잠을 자야 했다. 부족한 잠을 주말에 몰아서 자는 습관을 갖고 있기에 더더욱. 부족한 잠을 주말에 몰아서라도 자야 다시 평일을 보낼 수 있었다.



많은 글을 썼다. 전공과 교양 시간 때 모두. 많은 글을 썼다. 전공 시간에 썼던 모든 글에는 애정이 없다. 전공 시간에 썼던 열 편이 넘는 글에는 애정이 없다. 어떤 평가를 받을지 걱정하지 않았다. 어떠한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냥, 그냥 썼던 글들에 불과했다. 진심을 다해서 그냥, 그냥 썼다. 제출만을 목적으로.



애정을 가득 담은 쓴 글은 단 두 편이었다. 두 개의 강의에서 각 한 편씩. 모두 교양 강의였다.



첫 번째


어느 한 교양 수업에서 중간고사 대체 과제를 받았다. 드라마, 영화, 80년대-90년대 노래 등과 관련한 자신의 글을 쓰는 과제였다. 장르와 제한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대학교에 와서 받은 작문 과제 중 처음으로 얼른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영화 관련 문제에서 나는 소설을 썼다. 교수님께서 제시해 주신 영화들 중에서 한 영화를 택하여 글을 써야 했다. 그 영화들 중에서 나는 랍스터를 택했다.



더 랍스터
-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작품 -

영화 ‘ 더 랍스터 ’ 포스터



영화의 주제를 활용하여 글을 썼다. 넓은 주제로 ‘사랑’으로 정의했다. 그다음, ‘사랑의 형용에 대한 기준’으로 주제를 좁혔다. 그러고 나서 글을 시작했다. 진심을 다 해서. 그 글이, 흰동가리 이다.


흰동가리를 다 쓰고 나서 계속 신경이 쓰였다.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까. 대학교 와서 쓴 글들 중 처음으로 애정을 가득 담은 글이었다. 애정을 가득 담은 만큼 내 글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에 대해서도 계속 걱정했다.


대학교에 입학 후 들은 강의들 중 처음으로 대학교 수업이라고 느꼈던 강의에서, 처음으로 애정을 가득 담은 글을 썼다.



두 번째.


두 번째 강의에서는 자신의 삶 일부분을 소개하는 글을 써야 했다. 고 싶은 대로 써 보라는 교수의 말씀에 정말 마음 편하게 글을 썼다.


내가 쓴 글을 읽었다. 여기저기서 피어난 웃음들이 퍼지고 퍼져, 강의실은 순식간에 웃음으로 가득 찼다. 웃음소리를 들었다. 군더더기 없이 기뻤다. 그 자체로 기뻤다. 짧은 시간 동안 나의 일부분을 담은 글이었다. 일부분을 담는 동안 애정도 고스란히 담겼다.






마지막으로 강의실을 나서며 안녕히 계세요, 인사했다.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글을 너무 재밌게 잘 써요.



대학교에 입학 후 들었던 몇 없는 칭찬들 중 최고의 찬사였다. 연신 감사드린다고 말씀드렸다. 억지로 글을 쓴다는 기분이 가득했을 때, 그 말을 들었다. 교수님께 털어놓았다.



교수님, 요새 글을 쓰는 게 힘들어요.



그저 힘들다고 말했을 뿐인데, 교수님은 이해해 주시는 듯했다. 교수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며 말씀하셨다.



그럴 때가 있어요, 그래도 계속 써 봐요.



그래, 계속 써야 했다.

계속 써야 했다.

그래야 무엇이라도 쓸 수 있으니.





학교에서의 시간


학교에서의 시간은 늘 바빴다. 학창 시절 동안은 정해진 점심시간이 있었지만, 대학교는 아니었다. 점심시간도 자신이 창조해야 했다.


내 시간표는 거의 빈 시간이 없다. 가득가득 메꿔져 있다. 빨리 끝내고 내 시간을 얻는 게 중요했기에, 최대한 시간을 이어서 시간표를 만들었다. 내가 밥을 먹을 수 있었던 날은 30분의 공강과 오전에 수업이 끝나는 날들뿐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늘 뛰어다녔고, 늘 바빴다. 종강을 하고 나서 생각해 보니 나는 왜 이리 바빴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여유롭게 학교를 누비며 학교에 오래 머무는 것보다는, 촉박한 시간표와 함께 학교에서 금방 나오는 게 더 나았다. 학교는 너무나 좋은 배움의 공간이었지만, 그뿐이었다. 배움이 있을 때에만 머물고 싶었다. 배움이 끝나면 학교를 벗어나고 싶었다.


학창 시절을 비롯하여, 학교에 대해서는 늘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학교가 나의 공간을 침범하려 한다.



학교에 머무는 동안 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쉬는 시간에 마저도. 학교에서의 시간과 나만의 시간에는 굵은 경계가 존재한다. 학교에 오래 머물게 되면 점차 학교의 색으로 물들어 간다.


학교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굵은 경계는 서서히 얇아진다. 얇아진 선은 이내 사라지고 만다. 기어이 경계는 무너지고, 마침내 학교는 나의 시간과 공간을 침범한다.


그렇게, 학교가 침범한 공간 속에서 입시를 치렀다. 다 지나고 나면 별 거 아니다, 라는 말은 시간이 지나도 공감할 수 없을 것 같다. 니한테는 별 거였기에.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그 시간은 결코 별 거, 라는 말로 치부될 수 없다. 지금도, 앞으로도.


대학생이 되면 반드시 그 경계를 회복하리라 다짐했다.





아직까지는 경계를 잘 회복하고 있는 것 같다. 경계가 회복되고 나면 이제는 휩쓸리지 않고, 내가 열고 싶을 때만 그 문을 열어야지.





방학



우리 학교는 졸업을 하기 위해 요건이 있었다. 다들 1학년 때는 너무 이르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 요건 자체가 나를 묶어둔 밧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든 빨리 끝냈다. 숙제든 뭐든.


이번에도 그러려고 한다.

늘 내가 해 온 대로 미리미리.


고,

방학을 가득 만끽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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