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정이야.
동네에 있는 카페에 갔다. 그리고 화장실을 갔다. 휴지를 깜박했다. 카페로 다시 다녀오려던 중, 앞에 계셨던 어느 분께서 휴지를 나눠 주셨다. 낯선 나에게, 낯선 분으로부터 받는 호의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색하면서도 너무나 감사했다.
그렇게 열심히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다. 카페로 다시 돌아 왔을 때에는 '친절하신 분으로부터 받은 감사한 호의'라는 생각이 전부였다.
그렇게 다시 대화를 나누며 커피를 마시던 중 눈 앞에 벌레가 보였다. 벌레는 느린 속도로 날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주먹을 쥐었다. 벌레가 사라졌다.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손을 폈다. 보자기에는 거무튀튀한 가루가 묻어 있었다. 바스라졌다. 아무런 생각 없이 뻗었고, 쥐었던 나의 손 안에서 느렸지만 자유로이 날고 있던 벌레는 기어이 가루가 되고야 말았다.
블편함을 주었다고는 해도 미안함은 보자기로도 가려지지 않았다. 손을 씻기 위해 다시 화장실로 향했다. 문을 열었다. 아까 전에 나에데 호의를 베풀었던, 낯설었지만, 친절한 사람을 다시 마주했다.
그 분과 나는 어색했지만, 아까보다는 익숙한 미소로 인사했다. 그분과 나는 조심히 들어 가세요, 라는 말로 인사를 마무리했다.
그분의 목소리는 조금 컸다. 큰 목소리가 울렸다.
- 누군데? 그렇게 인사 해?
그분과 함께 계셨던 친구분의 목소리인듯 했다. 곧 그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아까 화장실에서 만났는데, 걔가 아무것도 안 들고 있는 거야. 그래서 걔한테 휴지 줬지.”
전부 들렸다. 평범한 대화다.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던 말이다. 하지만, 그당시 내가 저 말을 들었을 때에는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예정'이라는, 이름이 있다. 나를 세상에 디딜 수 있게 해 준 나의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걔'라고 불렸다.
자신의 이름이 아닌 인칭대명사로 불린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다시금 실감했다. 우리는 어느 공간에서든 누군가를 부를 때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그분의 직업을 부를 때 사용하는 명칭으로 사용한다. 오히려 그 경우가 나은 것일까. 가까운 식당에만 가 보아도 그분들의 직업보다는 '여기요!' 등을 더 많이 들을 수 있다.
그럴 때마다 그분들의 기분은 어떠하실까. 처음에는 조금 낯설었을 지언정 점차 무뎌지셨을까. 당장 나의 엄마와 아빠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편지 혹은 선물을 드릴 때 부모님의 존함을 밝힌 문구와 함께 준비하면, 간혹 놀라시고는 한다.
처음에는 내가 선물을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라시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었다. 평생을 아빠, 엄마로만 말할 줄 알았던 자식이 이름 석자와 함께 불러 주었다는 점에서 감회가 남다르셨나 보다.
그래, 나는 이름이 있다. 아직 나는 학생이어서 내 이름을 나 스스로도 많이 부르고, 많이 불리어진다. 훗날 나도 그럴까. 나의 이름이 아닌, 직업명으로 불리는 게 더 익숙해지게 될까.
우리 모두가 그러했겠지. 나의 이름이 어색해지리라고는 감히 알 수 있었을까. 걸음을 디딜 수 있도록 데려다 준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 이름이, 되려 어색해진다니. 마치, 나 자신을 잃는 것처럼 느껴질 것만 같다.
이름은 나를 나타내어 주는 첫 번째이자, 그 자체이다. 그런 이름이 어색해진다면, 그럼 나는 스스로와 얼만큼 멀어졌다는 의미일까. 얼마나, 서러울까.
지킬 수 있는 다짐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지키고 싶기에, 나를 잃지 않고 싶기에, 다짐해야지. 나는, 나의 이름을 지키고, 나를 잃지 않아야지.
나는 '걔'가 아니야.
나는 예정이야.
바스라지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