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수조건을 향한 사막행
탈조선의 두 번째, 영주권이다.
언어라는 산을 정복했다면 그 다음은 영주권을 위해 젖먹던 힘을 발휘해야 한다. 탈조선을 하고 이민 정착을 하기위한 필수적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영어로는 Permanent Residency, 줄여서 PR, 즉 그 나라에 영구히 거주할 수 있도록 외국인에게 부여하는 권리이다. 시민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서도 영구토록 체류하고 취업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 영주권은 진정한 탈조선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왜냐하면 탈조선을 한 사람의 불리한 점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법적인 권리이기 때문이다.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 서러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모르는 곳이기에 당하는 일도 많고 겪어내야 하는 일도 많다. 그런데 영주권마저 없다면 발 디딜 곳이 없다.
영주권자가 아닌 학생비자, 워홀비자, 취업비자, 관광비자 등의 소지자들에게 무수히 많은 사건, 사고들이 일어나고 해결이 잘 안되는 이유는 하나다. 그 나라에서 영구거주인으로서의 나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자격 조건, 즉 영주권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 해결을 위해 대사관 혹은 영사관을 거쳐 본국으로 송환되는 절차를 밟게 된다. 도움을 요청하러 그 동네 지역 구청이나 동사무소 같은 곳(호주의 경우 City Council)에 갈 수도 없고 간다고 해도 영주권자 혹은 시민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비영주권자의 권리나 의무를 자국민처럼 들어주거나 보호해 줄 법적인 책임이 없다. 다시 말해 그 나라의 영주권이 있으면, 어떤 문제가 생겨서(예: 직장을 잃었습니다. 실업급여 신청가능하나요?, 대학원을 등록하려는데 학자금 대출/지원 가능한가요? 등등) 나의 권리를 주장했을 때 받아들여지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수용이 된다는 말은 해결이 가능하다는 말이고, 해결이 안 될 경우 내 권리 주장에 상응하는 보상 내지는 협상안이 주어진다는 이야기다. 탈조선러에게 이 점은 아주 중요하다. 자국을 떠나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그래서 극복해야 할 불리한 약점들이 많은 사람에게 정말 중요한 무조건적인 조건이다.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내 자아가 숨을 쉴 여건이 마련되지 않는다.
교육심리학에 매슬로의 욕구단계설이란 이론이 있다.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위치한 자아실현(self-actualisation)이라는 상위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그 밑에 위치한 하위욕구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유학이든 해외 취업이든 아무리 탈조선을 했지만, 영주권이 없다면 하위욕구들을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단계별 욕구가 채워져야 상위 욕구로 나아갈 수 있다. 탈조선인으로 해외 취업에 성공했다면, 안주하지 말고 더 나아가 그 나라의 영주권을 도전해보자. 그리고 영주권에 성공했다면, 그 나라의 모범 시민이 되기 위한 노력을 하자.
나의 경우 필수적인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서호주 사막 행을 감행했다. 시드니대학 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자마자 서호주 주 정부 후원 영주권을 위해 서호주 교육청에 교사등록 신청을 했고 승인이 났다. 말이 주정부 후원이지 사실 40도가 넘는 서호주 사막 한가운데 지어놓은 Detention Centre(난민 수용소로 이 안에는 이민성, 병원, 학교, 숙박시설이 들어가 있다.)라고 철통 보안 속에서 난민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3년간의 선생질…40도가 넘어 체감온도 50도에 육박하는 서호주 아웃백 사막의 기후는 가히 죽음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즐거웠다. 내 영혼이 조금씩 숨을 쉬는 느낌, 작열하는 서호주의 뜨거운 태양 아래 내 스스로가 숨통이 트였다. 서울에서 월세방 살면서 애들을 가르칠 때와는 너무 달랐다. 그래서인지 그 고생스러운 시간들이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아마 생사를 오가는 중동 난민 아이들의 천진난만함 때문이리라!
보안관계로 입구에서부터 공항 검색대 지나가듯이 노트북 핸드폰 카메라 등등 전자기기를 압수당하고 퇴근과 동시에 투명한 비닐백에 다시 돌려준다. 그 덕에 아예 사진이란게 없다. 수업도 연필과 종이만 가지고 구식으로 진행한다. 테러관련 위협 혹은 정보 유출관련 보안으로 전자기기 일체 압수 및 사용 불가가 규칙이다. 난민이라는 특성때문에 사회에 나오더라도 관련 부서 일을 했던 직원들과도 연락을 할 수 가 없다. 보안 이유로 법적차단을 한다. 호주 이민성이라는 정부 부서가 엄청난 곳임을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솔직히 이렇게 공개적으로 글을 써도 되나 싶은 지금이다. 그렇지만 자세한 기밀정보는 하나도 없기에 안심하며 적어본다.
처음 일한 곳은 고위험군(UAM이라고 불렀다. UnderAgedMinors 즉 중동 난민 십대 소년들로 반정부, 테러에 가담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고위험군으로 분류해 사회화 교육이 시급한 그룹, 특히 내가 담당했던 언어교육이 시급했다.)이 모여있던 레오노라 수용소였다. (Leonora: 서호주 퍼스에서 약 1000키로 이상 경비행기를 타고 들어가면 금광/탄광촌으로 알려진 칼굴리(Kalgoorlie)라는 소도시가 나오는데 또 다시 칼굴리에서 300키로 이상 운전하면 나오는 빨간 사막 동네이다.) 이후에 난민 수가 줄어들고 당시 호주 수상이었던 토니 애봇의 'Stop the Boat' Policy(중동난민이 배를 타고 호주 해안으로 들어왔었는데 그들을 더이상 받지 않겠다는 '배 막기 정책'으로 덕분에 나는 직장을 잃는 줄 알고 간을 졸였었다)'로 서호주와 북호주 곳곳에 수용소 문을 닫았다. 그로인해 나는 서호주 남쪽에서 북쪽 킴벌리 지역으로 수용소 재배정을 받고 브룸(Broome)이라는 곳에서 삼사백킬로 차로 이동하면 나오는 더비(Derby)를 지나 커틴(Curtin)이라는 곳에 가게 되었다. 다행히 저위험군이 있는 곳이어서 경비가 삼엄하지 않아 아래사진들을 몰래 찍었다. 벌써 8,9년된 사진이다. 지금 현재 뉴스에서 듣기론 남아있던 난민들을 크리스마스 아일랜드(Christmas Island: 호주와 인도네시아 사이 인도양에 위치한 호주령 섬)수용소(예전부터 최고 위험군들이 불려가는 악명높은 수용소)에 몰아 넣어 장기 고립을 시켜놓은 상태라고 한다. 사실 레오노라 수용소가 문을 닫았을 때 하마터면 크리스마스 아일랜드 수용소로갈 뻔 했었다. 몇몇 직원들은 기다림에 못이겨 실제로 가기도 했다. 나는 주유소 캐셔 알바일과 청소일을 하며 빨간 모래 사막 레오노라에서 남은 직원들과 석달을 더 버텼고 커틴 수용소에 자리가 났다는 말을 듣고 손을 번쩍! 저요 저 갈게요! 자동반사적으로 지원을 했다. 천만다행이었다. 더비에 도착하고 석달이 지났을 무렵, 나의 영주비자 담당을 맡았던 케이스 매니저 가브리엘이 전화가 왔다. 곧 영주권 승인 레터 (Grant Notice) 이메일로 갈거라고.
나에게 태양이 작열하는 서호주 아웃백으로 또다시 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YES다!
소중한 영주권을 얻어낸 곳이었고 내 자아가 성장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서울에서 학교 선생 일을 하던 시절로 또다시 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NO! 죽어도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 다시말해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고생은 결국 고생이 아닌 나를 성장시켜주는 자양분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고생은 자유를 얻기 위한 대가로 충분히 치를만했다. 왜냐하면 더 단단한 어른으로 성장한 자아를 마주하게 될 테니까!
덧 1. 영주권이 중요하다는 말에 앞도 뒤도 재지않고 호주 영주권을 받을 수만 있다면 어떠한 방법이든지 덤비려고 한다면 노노! 플리즈 노노!! 반드시 언어조건을 채우고 난 다음, 직접 이민성 홈페이지에 들어가 충분한 사전 조사를 하고 모를 경우 이메일 혹은 전화로 물어보는게 옳다. 이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얻고 배울 수 있으며 유학원이나 에이전시가 전해주는 정보를 정확하게 분별해서 나에게 맞게 소화할 수 있게 된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결국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