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조선의 세 번째, local network 로컬 네트워크, 즉 현지 인맥이다.
언어와 영주권을 해결해가고 탈조선러가 정착을 하는 과정에서 무조건적인 조건이 있다. 바로 현지인 인맥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현지인 인맥에 대한 개념 설정에 관한 주의이다. 해외 유학이나 취업 혹은 이민을 결정하고 시도할 때 오류를 범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오류를 최소화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간단하게나마 조금 적어보려 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인맥은 필연이자 필수라고 생각한다. Networking을 잘해야, 즉 인맥관리를 잘해야 좋은 인간관계가 형성이 되고, 많은 기회들이 창출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개념이 있다. 현지 인맥이라 함은 ‘현지인(local person)’ 인맥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의 현지인,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일을 하며 먹고사는 본토박이 인맥 말이다. 그리고 그 인맥은 무조건 있어야 한다. 없으면 너무 힘들다. 맨땅에 맨손으로 땅굴을 파는 격이다.
그러나 주의할 점이 있다. 해외 취업, 유학, 이민이라는 명목 하에 탈조선러들이 현지인 인맥을 쌓을 때 종종 실수를 범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이민자들의 커뮤니티인 한인촌이라 불리는 코리아 타운에서 알게 된 인맥을 현지인 인맥이라고 착각하는 경우이다. 냉정하게 정의를 내리자면, 코리아타운은 위치만 이동한 작은 헬조선이다. 큰 헬조선을 벗어나 작은 헬조선으로 갔다는 건 진정한 탈조선이 아니다. 해외에 있지만 한인촌을 못 벗어나고 그 안에서 괴로워하고 있다면 앞서 언급한 탈조선의 제로 조건(언어)과 필수조건(영주권)을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로컬 네트워크, 즉 현지인 인맥은 본토박이 인맥을 일컫는다. 꿈을 안고 제주도에 정착하려고 내려갔다고 생각해보면 와닿는다. 제주도 본토박이 삼춘들과의 인맥을 쌓는 것이 제주도에 뼈와 살을 묻을 만큼의 소속감과 유대감으로 이어지고 이는 곧 제대로 된 정착생활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그런데 이 호주 본토박이 인맥을 얻으려면 탈조선의 첫 번째 조건이었던 언어를 정복하지 않고서는 참 어렵다.
나의 경우, 대학 1학년 때 처음으로 캐나다 어학연수를 갔었다. 그리고 당시 한인촌 인연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현지 인맥이라고 착각을 했었다. 지금은 그들 중에 단 한 명도 연락을 하는 인맥이 없다. 오히려 이용을 당했었다. 그래서 호주에 왔을 때는 학부시절 나에게 추천서를 써주신 벨기에 태생 호주 출신 원어민 교수님과의 인맥을 진심을 다해 이어나갔다. 교수님은 전형적인 호주 이민자 가정 1.5세로 이민자로서 호주에서 내가 겪어내야 할 일들을 잘 알고계셨다. 호주에 와서 교수님을 통해 알게 된 대부분의 호주 사람들 역시 호주 본토박이었으며 그들의 부모세대는 이탈리아, 몰타, 프랑스 등 이민 1세대들이 꽤 많았다. 결국 현지인 인맥이 큰 도움이 되었고, 지금은 고향 부모님께서도 의지할 만큼 교수님 식구들이 큰 힘이 된다. 교수님 덕분에 호주에서 집을 구하고 차를 사고 병원을 가고 은행업무를 보고 심지어 직장을 찾고 등등 누구보다 빠르고 진정성 있게 하나하나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 서호주 난민촌일도 교수님과 교수님 지인의 추천서로 확정을 받고 가게 된 일이었고 울릉공에서 카페사업을 한 일도 현지인 도움이 컸다. 나 개인의 부단한 노력도 있었지만 사실 로컬 네트워크가 없었다면 이방인으로서 호주가 너무 힘들고 싫었을 것 같다.
그렇다면 호주에서의 네트워킹(Networking), 즉 인맥관리란 어떻게 다를까? 인맥 관리하면 한국사회에서는 주로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이루어진 유대관계를 일컫는다. 동향 사람이어서 알음알음 사돈에 팔촌이어서 동문이어서 등등의 이유로 서로 소개를 해주고 형님 아우 하면서 친하게 지내는 관계 말이다.
반면 호주사회에서의 인맥 관리, 즉 네트워킹은 믿음 공동체 관계이다.
그 밑바닥에는 기본적으로 신뢰(Trust)라는 게 깔려있다. 그리고 그 신뢰를 쌓는 데에는 무수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무엇보다 이 신뢰가 무너지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을 믿어주는 신뢰의 기저에는 정직함(Integrity)이라는 기본 조건이 있는데 신뢰가 무너졌다는 말은 온전치 못한, 즉 정직하지 못한 일을 저질렀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네트워킹 리스트에서 자연스레 빠지게 된다. (호주에선 이런 걸 'words of mouth'라고 한다. 이 사람 저 사람 입을 통해 말이 전해져 다 알게 된다는 뜻이다.)
내가 살고 있는 호주는 어떻게 보면 유럽권이나 북미권보다 훨씬 강한 신뢰에 기반을 둔 네트워킹 사회이다. (적은 인구 수에 국토의 80프로가 사람이 살기 힘든 불모지여서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이 믿음은 생활 다방면에 영향을 미친다. 병원을 가서 의사쌤을 만나고 취업 준비를 하고 직장에 면접을 보러 가고 집을 구하고 등등 현지인 인맥 중에 아는 사람이 나를 믿고 Referral 즉, 추천 혹은 소개를 해주면 '척'하고 일이 처리된다. 호주에서 구직경험이 있는 자라면 이력서에 우리말로 추천서라고 하는 Reference의 기능 혹은 힘을 잘 알 것이다. 고용주 혹은 인사과 매니저(HR manager)는 이 레퍼런스에 적힌 추천인에게 전화도 하고 이메일 연락도 하며 소위 구직자의 character reference (성향/성격 추천)를 물어본다. '스펙좋은 인재인가'가 아니라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인가'를 묻는 것이다.
즉, 모르는 사람이 아무리 뛰어난 학벌과 경력으로 도배된 이력서를 제출하더라도 호주에서는 별 소용이 없다. 되려 아는 사람 지인 누구누구가 소개한 사람을 고용한다. (이런 사람이 이미 내정자일 가능성이 높다.) 설령 그 사람의 학벌이 낮고 교육환경이 저조하더라도 믿고 일을 맡긴다. 그 이유는 신뢰이자 그 믿음의 밑바탕인 진정성, 즉 정직함(Integrity)이다. 아무리 좋은 대학 석,박사를 받더라도 이민자가 혹은 이방인이 잡서칭(job searching)이 힘든 이유는 믿을 만한 추천서(Reference)가 없어서이다. 그리고 이직을 할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같이 일하던 상사나 동료의 인성 추천(Character reference)이 다음 직장에서 너무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믿고 소개를 받아 직장에 들어간 사람은 나를 추천해준 분과 고용해준 분에게 누가 되지 않게 정말 정직하게 열심히 일을 한다. 그러면서 한 해, 두 해, 십여 년 세월이 지나면 믿었던 신뢰가 버팀 속에서 더 단단해지고 또 다른 소속감과 유대감(professional solidarity)으로 뭉치게 되고 존중을 받게(respected)된다. 그래서 호주는 신뢰 기반 네트워킹이, 다시말해 한국과는 개념이 다른 '인맥'이 너무 중요한 사회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잔머리를 써서 나의 이득을 앞세우거나 눈치 발로 뒤통수를 치거나 한다면 호주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대놓고 욕을 퍼붓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할 경우 법정에서 만난다. 문화가 다른 이민자들에게도 예외는 없다. 워낙에 투박하고 솔직하다 못해 정제되지 않은 야성의 모습을 지닌 호주 사람들이라 신뢰에 금이 가는 행동을 하면 불리한 점이 많은 이민자들에게도 얄짤없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이 종종 무식한 인종차별주의자로 보일 때도 있다. 변화구가 아닌 직구를 던지는 호주 국민성이 한 몫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바로 믿음에 기반한 네트워킹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섣부른 자에 대한 야성 어린 꾸짖음이다. 고깝게 받아들일게 아니라 반대로 뒤집어 고심해보면 정직하게 신용을 쌓아갈 경우 (군소리 없이 묵묵히 버틸경우) 호주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인간적 대우를 해준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가 요즘 느끼고 있는 부분이다. 아무런 폄하 없이 어떠한 훈수도 두지 않은 채 믿고 나를 옹호해준다. 그래서 말인데 허투루 호주살이 12년을 견뎌온 게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힘을 내는 요즘이다.
정리하자면 우리가 당장 해외여행만 가더라도 현지인 가이드가 있고 없는 차이는 엄청 크다. 하물며 장기간 정착해서 살 곳은 여행지보다 더 많은 고급 현지 정보가 필요하다. 물론 요즘에는 인터넷의 도움으로 필요한 현지 정보가 검색이 가능하다. 그래서인지 나를 포함한 요즘 MZ세대 꿈돌이 꿈순이들은 인터넷이 없던 예전 시절만큼 현지 인맥에 굳이 연연하지 않는다. 하지만, 호주처럼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자연을 벗삼아 사람들과 연대하며 아날로그 감성으로 일을하고 살아가는 곳에서는 로컬 네트워크가 필수적이다.
덧 1. 한국사회에서 개인의 능력이라 함은 안타깝게도 학벌, 집안, 재력 등등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포함한다. 그래서 흙수저 출신은 오롯이 개인의 능력만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싶어한다. 그래서 팁! 호주사회에서의 능력이라는 개념은 Consistency(일관성)에 기반한 Performance Outcome(일의 성과)다. 그래서 생면부지 모르는 사람이 아닌 아는 사람의 소개로 온 아무개를 고용하는 이유이고 일관되지 못한 업무태도나 성과를 보이면 무능력한 사람 취급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잘 버텨내는 호주인을 "Aussie Battler"(일명 '호주 악바리', 인생에서 어떠한 역경이 와도 악착같이 버티고 이겨내는 호주사람이라는 뜻으로 척박한 땅을 개척해 버틴 호주 사람들만의 삶의 애착을 여실히 보여주는 단어이다.)라고 부른다. 흙수저라도 상관없다. 일관된 행동과 말로 오랜 기간 업무 성과를 꾸준히 보여주면 호주 사회에서는 믿고 일을 맡기며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
덧 2. 코리아 타운에 대한 저평가를 하려는 의도는 없음을 덧붙이는 바이다. 호주 한인사회에 모범이 되고 정착을 잘하신 분들이 호주 이곳저곳에 참 많다. 그렇지만 미국처럼 한인 이민사가 100년이 넘지 않았고 (서호주 난민촌에서 이민성 일을 할 때 직원 한 분이 그러셨다. 한 이민 인종이 사회 문화적 흡수 정착을 하려면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에 이르는 3세대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무엇보다 한인촌 내부적 갈등과 이해 관계 마찰을 완화하기 위한 노력들이 긍정적이나 아직은 진행 중이고 미흡한 게 현실이다.
삼년전 시드니에서 한호수교 60주년 기념행사를 했지만 사실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1850년대 골드러쉬를 통해 호주에 처음 이민을 온 중국인들이 부럽기도 했다. 호주에서 가장 많은 이민 인종을 차치하며 현재 정치, 경제, 문화 등 호주 주류사회의 다방면에서 중국인 3세 4세들이 활약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 세계대전 당시 호주로 넘어와 흡수 통합이 빠르게 이루어진 유럽 이민자들의 커뮤니티도 다시 보였다.
여하튼 이민사 이야기 참 마음 아프지만 한인촌 인맥이 호주 현지인 인맥이 아니라는 쓴소리를 적은 이유는 탈조선를 꿈꾸고 계획하는 꿈돌이, 꿈순이들이 혜안을 가지고 현명한 판단을 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함이다. 현재 호주 전역에 십이만명 가량의 한인 교민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현실은 녹록치 않다. 마치 1700년대 후반 영국 죄수(British Convicts)들이 호주라는 먼 땅에 도착해 황무지를 개척하던 때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아마도 인종과 성과 문화를 다 떠나 인간이기에 낯설고 물선 땅에서 살기 위해 삶을 버티고 애착하며 그 안에서 희노애락을 나누는 모습이 닮은 탓이리라. 무엇보다 삶에 대한 그 고단한 애착이 지금의 2세들에게 넘어왔다. 또 다른 축으로의 이동...부디 잘 버텨내주길...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