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크면 클수록 엄마가 나에게서 원하는 것들도 점점 커졌다.
명문대 가서 성공하기, 좋은 직장 들어가기, 좋은 집안에 시집가기, 돈 많이 벌기, 똑똑한 자식 낳아 기르기... 끊임없는 조건적 사랑의 나열이었다.
결국 나는 명문대 간판 때문에 수능 삼수를 했고 합격한 명문대는 돈이 없어 못 갔고 대신 엄마가 원하는 지방사범대에 전액 장학생으로 수석 입학했다. 내가 원하던 과는 아니었지만, 수석 입학과 졸업을 했고 그 덕에 유학 보장 취업을 했고 엄마는 싫어했다. 아니 극대노하셨다. 결국 인턴 한 달 만에 부모님 건강 악화라는 거짓 이유로 자진 사퇴를 했고 머리끄덩이 잡히다시피 제주도 고향 집에 끌려갔다. 가택연금이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놓고 엄마는 진수성찬을 만들어 나를 설득했다. 늘 그렇듯 아빠는 엄마 편이었다. 화병이 났지만, 꾹 참고 노량진 고시촌을 택했고 삼수 끝에 11호봉 교사가 되었다. 엄마는 행복했다.
나는 불행했다. 내 인생이 아니라 엄마가 원하는 인생을 사는 내가, 아니 그렇게라도 해서 엄마의 사랑과 인정을 얻으려 했던 내가 비루하고 남루했다. 조건적 사랑의 노예가 된 결과 나를 잃었다. 기쿠치병 진단을 받고 괴사된 혹을 떼어내는 수술을 하고 목에 붕대를 감은 채 마지막 수업까지 마치고 사표를 내던졌다. 그리고 나의 생존을 위해 여고 시절 꿈이었던 ‘엄마 찾아 삼만리’의 소년 마르코가 되기로 결심했다. 호주로의 자발적 이민을 계획했고 시드니 대학 교육대학원 입학통지서를 받았다. 그때가 계란 한 판 직전, 스물아홉이었다.
3월 학기 입학 날짜가 다가왔다. 그런데 엄마는 또다시 동네 무당집, 보살집, 점집을 전전하며 어떻게든 나를 붙잡아 둘 이유를 찾으려 했다. 비행기 사고가 난다더라, 그 날짜에 가면 이력이 안 풀린다더라, 몸이 아픈 다더라, 등등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비행기표를 연기시켰다. 결국 또 나는 엄마 말을 들어주었다. 덕분에 비행기표 값을 날렸고 첫 학기가 아닌 중간 학기인 9월 학기부터 대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대학도 삼수해서 늦게 들어가는 바람에 2년 어린 친구들과 다니고 동갑인 친구들이 선배여서 어정쩡한 위치에서 캠퍼스 족보를 말아먹었는데 대학원도 중간치기로 들어가 오리엔테이션이고 뭐고 없이 바로 수업부터 따라가야 했다. 그렇게 분노의 질주를 하며 정신없이 대학원 공부에 적응하고 있는데 엄마가 시드니로 날아왔다. 한 달을 나와 같이 셰어하우스에서 살며 학교 도서관이며 시내며 두 눈으로 확인하시고 제주도로 가셨다. 덕분에 나는 뒤처진 학과 성적을 만회하느라 몇 달을 학회지와 씨름하며 밤샘 공부에 시달렸다.
엄마는 자신의 조건과 기준을 벗어난 선택을 한 딸이 불안했다. 갱년기 우울증, 빈 둥지 증후군, 불안장애로 엄마의 신경질은 제주도에서 호주까지 날아오는 기폭제가 되었다. 엄마는 본인의 가치 기준만이 옳다고 믿고 그 기준을 벗어나면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불안해했다. 서울서 곱게 학교 선생 일하다가 좋은 데 시집가면 될 것을, 왜 사서 고생이냐며 그렇게 불안해했다.
무엇보다 엄마는 평생 애지중지 의지하며 키운 딸이 멀리 떨어져 독립적으로 사는 모습에 자신의 사지가 잘린 것처럼 아파했다. 정확히 성인 분리불안 증세를 보였다.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그렇게 나를 통제했다. 수시로 전화가 와서 지금 뭐 하니, 어디니, 누구랑 있니, 왜 엄마가 하란 데로 안 하니, 호주가 뭐가 그렇게 좋니, 등등 힘 빠지는 질문의 연속이었다.
‘동네 옆 건물에 미국 주립대 출신인데 고액 과외로 돈 엄청나게 번다더라, 너도 할 수 있어. 제주도 들어와라.’
‘영어유치원이 요새 인기라더라, 엄마가 빛 내서라도 차려줄게, 제주도 들어와라.’
힘 빠지고 진 빠지는 엄마 전화를 안 받거나 못 받으면 부재중 전화가 몇 통인지 난리가 났다. 중요한 대상이 연락이 안 되면 극심한 불안감으로 엄마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나열했다. 교통사고가 난 건 아닌지, 나쁜 사람한테 잡혀간 건 아닌지, 뭘 잘 못 먹고 병원에 실려 간 건 아닌지, 호주가 어떤 데라고 그 먼 데까지 가서 지랄인지...끝이 없었다. 자식 걱정으로 24시간을 보내는 엄마의 불안은 점점 심해졌다. 배려가 아닌 염려가 엄마의 자식 사랑 표현이라고 두둔하면서 그 시간을 넘어갔다.
그렇지만 나는 알았다. 애초에 엄마가 나를 어떤 조건도 없이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었다면 불안은커녕 나를 믿고 지지해 주었을 거라고... 게다가 가택연금이고, 노량진 고시촌이고, 호주 시드니 확인차 방문이고 전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그리고 엄마의 불안 장애는 안타깝지만 엄마 스스로가 일으킨 병이고 해결할 사람 역시 엄마 자신이라고... 마지막으로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며 엄마의 가치 기준과 조건들을 충족시켜 주던 내가 바보 똥멍청이라고...
그렇게 나는 엄마라는 적과 싸우며 이민 생활을 견뎠다. 나무도 이 땅에서 저 땅으로 옮겨 심으면 4배의 힘이 필요하다는데 나는 그보다 더 많은 힘을 내야 했다. 혼자서 유학 후 이민이라는 적과 싸우면서 엄마라는 또 하나의 적과 싸워야 하는 내 팔자가 싫었다. 더군다나 배기량이 1000cc도 안 되는 티코로 태어난 내가 아반떼도 아니고 배기량 5000cc나 되는 벤츠처럼 달려야 했기에 더더욱 힘들었다. 호주에서의 삶은 늘 투잡, 쓰리잡이었고 덕분에 지금은 폐차 수준으로 몸이 고장 났다. 말이 골드미스지 사실은 아픈 곳이 많은 골골 미스다.
지나고 보니 조건적 사랑의 끝은 나 자신을 잃고 영혼이 피폐해지는 것이라면, 그 사랑을 극복하는 길의 끝에는 건강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게 나의 경험이다. 그런데 자동차가 고장 나면 수리받듯이 몸이 아프면 고치면 된다. 그렇기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엄마로부터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Life is full of regrets, but it doesn’t pay to look back. -Zinedine Zidane
인생은 후회투성이고, 되돌아봐도 소용이 없다. -지네딘 지단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