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압수 및 외부 출입제한으로 모든 연락이 끊겼다.
한 달 후, 제주도 집 전화로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미경이 쌤이 전화가 오셨다. 미경이 쌤은 호주 교수님께서 학회에서 만나 오랫동안 중등교사 모임을 담당하며 알게 된 여고 영어쌤이셨다. 나에게 괜찮은 거냐며 자초지종을 물으셨고 엄마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간단하게 상황 설명을 했다. 건강하라는 마지막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고 나는 장기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의 시작은 엄마가 요구하는 조건을 마지막으로 들어주는 것, 바로 노량진 고시촌에 들어가서 학교 선생이 되는 일이었다. 3년이 걸렸고 학교 발령 후 대학원 공부를 병행하며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해외 유학 및 이민이라는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실행에 옮겼다.
당시 폐쇄 공포증을 안겨준 고시촌 생활은 교수님의 꾸준한 이메일과 전화 상담으로 버텼고 고시 공부 스트레스는 같이 공부하던 스터디원들과 나름의 유대관계로 위로를 받으며 견뎠다. 학교 교원 생활은 꾸역꾸역 버티다가 병이 났고 결국 자발적으로 사표를 냈다. 그리고 오랫동안 준비했던 시드니 대학 입학통지서를 받았고 비행기표를 샀다.
호주로 떠나기 전 고향 제주도 집으로 내려갔다. 엄마는 여전히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고 딸에 대한 애착이 집착으로 변해 있었다. 나를 자신의 분신이며 소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단지 엄마만의 방식으로 일방통행을 할 뿐이었다. 더욱더 호주로의 유학 후 이민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사랑해 주지 못하는 엄마에게서 그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멀어져야만 했다. 그래야 상처받은 나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계획대로 호주로 자발적 이민을 왔고 대학원 공부가 끝나고 서호주 아웃백 한복판에 난민촌 교사로 취업이 되었다. 엄마가 본인의 불안 장애를 이기지 못하고 확인차 방문했던 시드니에서 더 멀리 이주하게 되었다. 사막 한가운데에 인터넷도 잘 터지지 않는 난민촌으로 아주 멀리 날아가게 되었다. 나는 진심으로 행복했다. 반대로 엄마는 불안증세로 잠을 못 이루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안타까웠지만 엄마가 내 인생을 살 수 없기에, 내 인생 내가 살아야 하기에 정신줄을 잘 붙잡고 있어야 했다.
호주 교수님이 그러셨다. 내가 숨 쉬고 살아 있어야 엄마에게 화를 내든지 도와주든지 할 수 있는 거라고, 죄책감과 증오감으로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또 보인다면 더 이상은 도와줄 수 없다고, 그땐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병원에 있어야 한다고, 그러니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라고... 그렇게 나는 작열하는 호주 아웃백의 태양을 에너지 삼아 3년간 서호주 난민촌 생활을 하고 영주비자를 받았다.
그동안 참고 버틴 착한 내 심성이 통했던 걸까? 유학 후 이민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진 데에는 교수님의 도움이 컸다. 그리고 알았다. 아니 찾았다! 진짜 내 엄마이자 아빠 역할을 해준 고마운 사람을! 학부 시절 벨기에 태생 호주 출신 교수님과 교수님의 누이동생이었다. 그분들 덕에 내가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고 무엇보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
드디어 부족했던 욕구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정감이 들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자신감이 생겼고 유학 후 취업, 이민, 정착까지 무리 없이 차근차근해 나갔다. 무엇보다 마라톤 깨톡으로 엄마의 신경질을 받아내며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하느라 진이 빠지는 우울한 날이면 교수님과 교수님 누이동생에게 털어놓았다. 마음이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잘 살고 싶다고... 그렇게 호주에서 나는 진짜 내 엄마, 아빠 노릇을 해주는 파란 눈의 수호천사에게서 위로와 지지를 받으며 곪아 터진 마음의 상처가 서서히 치유되기 시작했다.
한 번은 엄마가 마라톤 깨톡 중에 ‘넌 거기 호주 교수님네가 네 식구니? 딸 노릇을 엄한 데 가서 하는구나.’라며 핀잔을 놓았다. 그럴 때면 마음이 서늘했다. 그렇다고 ‘엄마가 나를 때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해 주었으면 내가 지금 이렇게 살겠어?!’라고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저 ‘나를 도와주신 분들이라 그래...’라며 말끝을 흐릴 뿐이었다.
교수님네 식구 모두 이민자 출신이라 실존적 선택을 하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얼마나 소중하고 존중받아 마땅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나의 자발적 이민을 지지해 주었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나는 열심히 이민 생활을 했다. 지금은 노쇠하셔서 내가 도움을 드리고 있지만 사실 정서적 도움은 아직도 내가 더 많이 받고 있다. 그리고 당시에 나를 도와준 은혜에 비하면 지금 내가 드리는 도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건 아동기 정신적 외상(childhood trauma)으로 채워지지 않았던 욕구가 채워지면서(deficiency motive) 나에게 변화가 생겼다. 일탈과 스릴을 추구하던 자기 파괴적 행동이 사라졌다. 시드니 비구니라는 별명이 생길 만큼 바른생활을 하게 되었고 어떠한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게 되었다. 무엇보다 나를 성장시키기 위한 새로운 욕구들이 생겨났다. 엄마의 조건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들어갔던 사범대학을 잊고, 코로나를 핑계로 여고 시절부터 늘 하고 싶었던 통번역 공부를 했다.
늦은 나이에 멜버른공과대학 통번역 수업을 이수하면서 본격적으로 통, 번역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늙은 할머니가 되어서도 좋아하는 책을 읽고 번역하며 살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무엇보다 트라우마로 힘들어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마지막으로 죽고 싶었던 내 삶을 지금은 살고 싶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