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녀 사이 무조건적인 사랑은 없다.

by 레어버드

늘 조건부였다.

엄마가 원하고 좋아하는 걸 하면 사랑의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그렇지 않으면 매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일곱 살 때였다. 유치원에서 한복을 입고 단체 생일잔치를 하는 날이었다. 엄마는 아침부터 남동생과 똑같은 디자인과 색깔의 바지 한복을 입히려 들었다. 서울에 사는 이모가 특별히 사준 꼬까옷이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평범한 치마 한복을 입고 싶었던 나는 미운 일곱 살 고집을 부렸고 결국 아파트 이층 아줌마까지 내려와 복주머니에 백 원짜리를 넣어주면서 나를 설득했다. 세련되다는 둥 특별하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운운했다.


결국 어른들의 강요로 쌍둥이도 아닌데 남동생과 똑같은 바지 한복을 입고 잔뜩 머리에 힘준 엄마 손을 잡고 유치원엘 갔다. 나만 빼고 치마 한복을 입은 친구들이 물었다.

‘너 왜 남자 한복 입었어? 비켜, 절로 가.’ 친한 친구들이 바지 한복을 입은 남자아이들 쪽을 가리키며 나를 밀어냈다. 또래 집단이 중요한 나이에 처음으로 따돌림을 당했다. 그리고 사진사 아저씨, 유치원 선생님, 친구 엄마들, 심지어 기사 아저씨까지 모두 나를 쳐다보며 한마디씩 했다. 관심거리가 되는 게 싫었다. 생일이고 뭐고 새빨간 저고리와 노란 바지 한복을 벗어버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매만 맞을 게 뻔했다. 무엇보다 엄마가 원하는 바지 한복을 입어야 사랑의 눈으로 나를 바라봐 주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아침마다 엄마는 곧 중학생이 될 나에게 유치원생처럼 삐삐 머리를 해주었다. 덕분에 친구들의 놀림거리가 되었다. 옆자리, 뒷자리에서 삐삐 머리를 잡아당기며 깔깔거리며 놀리는 학교 친구들이 스트레스였다. 등하굣길에서 이름도 모르는 어떤 어른들은 반 친구들처럼 삐삐 머리를 꼭 한 번씩 잡아당겼다. 두피가 당기고 아팠다. 무엇보다 삐삐 머리를 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이 나에게 집중되는 게 부담스러웠고 온종일 스트레스였다. 삐삐 머리를 풀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괜히 풀었다간 매만 맞을 게 뻔했다. 무엇보다 엄마가 좋아하는 삐삐 머리라도 해야 사랑의 눈으로 나를 바라봐 주었다.


그렇게 나는 조건부 사랑이 자연스레 체득되었다. 엄마의 사랑이 한없이 고팠던 나는 엄마가 좋아하는 것들을 했고, 엄마가 싫어하는 일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매가 무서웠고 잠시지만 사랑의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엄마가 그냥 좋았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지 못하는 엄마에게서 사랑을 받으려면 엄마가 원하는 것들만 하면 되었다.


입으라는 대로 입기(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엄마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쳐 입고 신어야 했다),

먹으라는 대로 먹기(아동기 정신적 외상(childhoold trauma)로 먹고 체하고를 반복했다),

어린이 시간 끝나면 무조건 잠자기(저녁 9시 뉴스 소리가 어린이 시간 알람이었고 잘 때는 클래식을 들으며 잤다),

TV 보지 않고 책만 보기(덕분에 유행하는 노래나 춤, 드라마 대사를 몰라서 학교에서 종종 따돌림을 받았다),

친구들이랑 놀지 않고 공부만 하기(동네 친구들이 ‘OO야, 놀자!’라며 찾아오면 엄마는 ‘OO 지금 학원 갔어’ 같은 거짓부렁으로 돌려보냈다),

집안에서 조용히 하기(신경 사납게 했다가는 몽둥이가 부러질 때까지 맞았다),

학교에서 절대 감투 쓰지 않기(12년 내내 반장, 급장, 실장이었는데 엄마와 아빠는 ‘감투 쓰면 일만 해야 돼, 그러니까 하지마.’라며 달가워하지 않았다),

임명장, 상장을 받으면 남동생이 보기 전에 숨기기(엄마는 학업성적이 부진한 아들이 기죽을까 봐 노심초사했다),

동생 돌보고 공부하며 가겟방 보기(구멍가게 시절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엄마를 도와 술, 담배, 부식 거리를 팔았고 손님이 오지 않는 사이 예습, 복습, 숙제를 하고 동생 밥에 숙제를 챙겼다),

주말 농장일 도와주기(제주도 토박이답게 귤수저 집안이라 주말이면 온 식구가 과수원 막노동에 시달렸다)


따지고 보면 남동생과 나는 겨우 22개월 차이였는데 그 흔한 어리광 한번 부리지 못했다. 부모님만 과수원에 가는 주말이면 동생을 돌보며 하루 종일 가게를 보고 밥 챙겨 먹고 밀린 공부, 숙제, 빨래, 청소를 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절대 미성년자 혼자 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주말 내내 시집 과수원 막노동으로 지친 엄마는 가겟방에 오자마자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하루 종일 한 게 뭐냐며 잡도리를 해댔고 화가 제어가 안 되면 윤노리나무가 부러질 때까지 때렸다. 그럴 때면 엄마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이 악물고 팔굽혀펴기 자세로 덜덜덜 떨며 버텼다. 속으로 ‘엄마가 나라도 실컷 때리고 나면 화가 풀리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닭똥 같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꾹꾹 참았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사랑을 갈구한 나머지 ‘엄마가 원하는 조건을 충족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어.’라고 건강하지 못한 생각을 하며 자랐다.


성인이 되고 호주로 자발적 이민을 오고 골드미스가 되기까지 이런저런 사회 경험들이 쌓이고 전공이었던 교육학 공부를 포함해 잡다한 관련 서적들을 읽다 보니 어느 순간 깨달았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내리사랑이 무조건적 사랑의 좋은 예라고 교육을 받지만, 사실은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게 내리사랑이라는 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애착이나 끌림은 있겠지만 결국 조건이 덧붙는 게 인간이 하는 사랑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인간관계에서 가능하다고 믿고 싶었다. 특히 부모·자식 사이, 모녀 사이만큼은. 그렇지만 엄연한 나의 공상이었고 현실은 달랐다.


태생부터 엄마는 축복받고 인정받지 못한 존재였다. 외할머니는 자식을 열 명이나 낳았는데 엄마가 열 번째였다. 문제는 열 명 중 아들이 네 명이었는데 세 명이 전부 사산아였다. 겨우 살려낸 한 명이 지금의 외삼촌인데 외할머니는 트라우마 때문인지 금이야 옥이야 오로지 아들 바라기로 평생을 사셨다. 그래서일까. 외할머니는 엄마를 낳았을 때 이미 마흔이 넘은 노산이었고 아들인가 해서 낳았더니 딸이어서 젖도 물리지 않고 대바구니에 광목천을 씌운 채 내버렸다. 갓난쟁이가 울든 죽든 안 중에도 없던 외할머니는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산후우울증이 심하게 왔던 것 같다. 이튿날 타지에서 돌아온 외할아버지께서 대바구니에 버려진 갓난쟁이 엄마를 발견하시고는 주머니에 있던 눈깔사탕을 면포에 돌돌 말아 입에 물렸고 죽기 직전이었던 엄마는 그렇게 살아났다고 했다. 아들이 아니라 딸로 태어난 엄마는 외할머니가 바라던 ‘고추 달린 남자아이’라는 조건을 애초에 충족시켜 줄 수가 없었다. 불공정 거래의 산실이었다.


언젠가 같이 엎드려 맞던 남동생이 말했다. ‘누나, 엄마는 때릴 힘도 없다 없다 하면서 엄청나게 세게 때려. 알아? 기억나지?’ 그랬다. 엄마는 태생부터 생존을 두고 싸워야 했고 그 전투 능력은 슈퍼맨만큼 강했다. 그리고 엄마의 엄마인 외할머니도 열여섯 살부터 출산 기계로 산 세월이 생존이자 전투였다. 안 그러면 일본 정신대에 붙잡혀가는 시절이었으니까. 생존이 먼저인 그들에게는 부모와 자식 간의 불공정 거래가 주는 부당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결국 부모와 자식 간의 무조건적 사랑은 인간이 만들어 내고 학습된 이상적 기대 가치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게 내리사랑의 현실이다. 심지어 상황이 힘들면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신체적 정서적 학대가 일어나고 그 가운데 폭력과 폭언이 난무해 트라우마라는 상처만 남는다. 살면서 일어나는 모녀 사이 불공정 거래는 세대적 그리고 환경적 트라우마로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단지 우리는 그 당연한 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뿐이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이 서글플 뿐이다.


다행히 안타까운 엄마의 탄생 비화는 나의 감정적 갈망을 내려놓는데 쉼표가 되었다.

‘엄마도 엄마의 존재 자체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고 인정해 주는 엄마가 필요했겠구나. 어쩌면 나보다도 더 많이...’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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