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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비 Apr 30. 2023

미국에서 집밥 먹는 일상_ 여덟 번째

토요일

아침 9시,

느지막이 눈을 떴다.

여전히 곤히 자고 있는 남편.


먼저 욕실에서 따뜻한 샤워를 한다.

오늘은 집에서 저녁식사 초대가 있는 날이라 부지런히 움직이려 한다.


오늘 오기로 한 이들은 '쒸엔'과 '카트리나'


쒸엔은 중국에서 온 박사과정 유학생이다. 카트리나는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온 유학생이며 쒸엔의 여자친구다. 보스턴에서 갓 학부를 졸업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는데도 남편은 여전히 잠에 취해 있다.

평소 같았다면 이미 잠에서 깨 커튼을 젖힌 후 졸린 눈을 비비며 소파에 앉아있을 그였다.


뭔가 이상했다.


남편 옆으로 다가가자 눈을 반쯤 뜬 남편은 잠긴 목소리로

목이 아프다며 몸살이 온 것 같다고 말한다. 목요일 밤부터 목이 약간 칼칼하다더니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이번 주 여기저기 다니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남편,

어디선가 바이러스를 옮아 온 모양이다.


갑자기 남편이 걱정스러웠다.

다음 주 월요일에 바로 연구실에서 여러 미팅과 발표가 예정되어 있다. 이외에도 교회에서도 몇 가지 일을 맡은 남편이었다. 몸이 조속히 회복이 되지 않으면 그에게 다음 주는 너무도 고될 것이었다.


나는 남편을 위해 오늘 저녁식사 초대를 취소하기로 했다.

사실 지난번 이미 한번 취소를 하고 난 후 오늘 다시 초대를 한 것이었다.

지난번에는 내가 입덧으로 몸 상태가 영 아니어서 미룰 수밖에 없었는데 하필 오늘은 남편이 몸살 기운이 있다니.

그렇게 사이좋게 번갈아 가며 아프게 되었다.

또다시 약속을 미루는 것이 망설여졌지만 남편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코로나19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하여 다음으로 미루는 편이 안전할 것 같았다.


맙소사.

당일에 식사 초대를 취소하다니!

상당한 죄책감을 갖고 쒸엔과 카트리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금방 답장이 왔다.

이들은 걱정 말라며 오히려 남편의 쾌유를 빌어주었다.

심지어 카트리나는 코로나 자가검사 키트와 수프를

가져다줄 수 있다면서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알려달라고 했다.

마음 씀씀이가 참 예쁜 친구다.

그녀는 올해 여름 석사 과정을 위해 다른 지역으로 떠난다.

더 오랫동안 사귐을 갖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남편에게 오늘 식사초대를 취소했다고 알려주었다.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쉬는 남편.


우리는 늦은 아침식사로 검은콩 쉐이크, 요거트와 함께 사과와 바나나를 썰어 먹었다.


오늘 먹은 사과는 반질반질 빨간색이 무척 예뻤다.

코스믹 크리스프(Cosmic Crisp) 사과

 

"이 사과는 이름이 '코스믹 크리스프'래."


"무슨 이름이 그래? '우주최강 아삭아삭' 그런 건가?"


남편의 대답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오늘은 몸살 기운으로 아픈 남편에게 잘해 주고만 싶다.


점심으로 뭐가 먹고 싶냐는 나의 질문에 주저함 없이 해맑은 미소로 "삼겹살"로 답하는 남편.


나는 먼저 삼겹살과 함께 먹을 된장찌개를 끓일 준비를 한디.

어쩐지 된장찌개를 칼칼하게 먹고 싶다.

마치 이열치열처럼, 칼칼한 남편의 목에 칼칼한 된장찌개가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생각을 잠시 해본다.


2023.04.29 점심_잡곡밥/ 된장찌개/ 삼겹살/ 토마토 올리브유 드레싱 샐러드/ 상추/ 오이/ 김

삼겹살 1lb(약 450g)를 다 구우려던 나를 만류하며

조금만 덜자고 하는 남편.

그랬더니 생각보다 고기 양이 적다.

고기를 무척이나 맛있게 먹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두세 점 밖에 먹을 수 없었다.


"고기 내가 다 먹은 것 같아"


배불리 식사를 마친 남편이 말한다.


"다음에는 고기 다 구울 거야..."


나는 다소 뾰로통하게 답한다.


"자기가 너무 맛있게 먹어서 나는 많이 못 먹었어."


유치하게 한마디를 또 덧붙이고야 말았다.


전에는 식탐은커녕 먹는 것에 통 관심이 없던 나였다.

임산부가 되면 먹는 것에 세상 유치해지는 걸까.


남편은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저녁은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자고 제안했다.


'고작 먹는 것 가지고 유치하게 티를 다 내었을까'

괜스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오후 내내 남편과 식탁에 앉아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남편은 일을 하고 나는 출산준비물을 정리해 본다.


친절한 누군가가 인터넷에 올려놓은 출산준비물 리스트가

내 시간을 훨씬 단축시켜 주었다.


어떤 품목들은 한글로도 이름이 생소했다. 

'도넛방석'이라고?

그런 것들을 영어로 알고 있을 리는 만무했다.


이때 갑자기 떠오른 '챗GPT.'

영어로 번역해 달라는 명령과 함께 한글로 된 몇 십 개의 품목 리스트를 붙여 넣으니 순식간에 눈앞에 몇 영문 리스트가 나타났다. 물론 다소 어색한 표현들이 있어 조금 손을 봐주어야 했지만, 이 정도면 매우 훌륭한 편이었다.


옆에서 보던 남편도 감탄한다.

"세상 많이 좋아졌네"

나보다 두 살 어린 남편이 이렇게 말하자

갑자기 그가 나이 지긋한 아저씨처럼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저녁으로 배달앱을 통해 햄버거를 주문해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유명 프랜차이즈의 치킨버거.

매일 집밥을 먹기 때문일까.

가끔씩 먹는 패스트푸드도 무척 맛있게 느껴진다.



저녁을 먹고 산책 겸 근처 마트에 우유를 사러 간다.

다소 흐린 하늘에 가랑비가 내리는 날씨.

그렇지만 공기가 상쾌하다.

아파트 단지 내 화단에서 향긋한 향이 은은하게 풍겨져 온다.


우산 하나를 사이좋게 나눠 쓰며 가는 길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우유와 빵을 핑계로 가벼운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다.


밤 내내 계속 남편의 목 상태를 살피는 나.


그가 아플 때 내가 함께 할 수 있어서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에서 회사 생활을 하던 때 혼자 독감 앓이를 하며 얼마나 서러웠던지 어렴풋이 떠올랐다.


몸이 아파도 누군가 함께 있으면 조금은 더 견딜만한 법이다.


'함께'라는 사실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



예배가 있는 내일,

말씀이 나와 남편을,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을 채워주길 바란다.


또다시 한 주를 살아갈 소망과 방향이 되어주길,


가지런히 정돈된 마음가짐으로

내게 주어진 한 주를 맞이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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