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자취하는 딸을 보러 아버지가 지방에서 올라온다. 둘은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지만, 아버지가 하는 말은 딸에게 모두 잔소리로만 들린다. 어찌저찌 어색한 식사 자리가 끝나고, 버스 터미널에서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탄다. 딸은 아버지에게 내내 툴툴댔던 일이 마음에 걸려 뒤늦게 눈물을 글썽이며 손을 흔든다. 아버지는 버스의 차창 너머로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대학생인 딸이 갑자기 어린 꼬마애로 변한다. 아버지의 눈에 딸은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어린 꼬마애일 뿐이라는 암시일 것이다.
워낙에 훌륭한 드라마라 이 장면 말고도 명장면이 수두룩하지만, 내게는 유독 이 장면이 길게 마음에 남았다. 왜 그랬는지 생각해보니 요즘 나의 상황과 묘하게 맞물려있어서인 것 같다. 나의 아들, 그 애가 최근에 나의 키를 뛰어넘었다. 멀리서 보면 아직도 어린애로 보이는데, 가까이서 키를 재보면 나보다 크다. 나는 이 상황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이가 나보다 클 수 있으리라고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언젠가 맘카페에 이런 질문이 올라온 적이 있다. ‘아들이 언제까지 귀여우셨어요?’ 댓글들이 다 주옥같았다. 초등학생이 되면서부터 귀엽지 않아졌다는 댓글도 있었고,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인데 아직도 귀엽다는 댓글도 있었다. 그중에 압권은 이 댓글이었다. ‘저희 시어머님은 아직도 남편이 귀여워 죽겠다는 눈으로 쳐다봐요.’ 그걸 읽을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웃고 넘어갔는데, 요즘의 나를 보면 나도 그러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나의 남동생은 어려서부터 키가 크고 덩치가 좋았다. 엄마는 중간 키, 아빠는 작은 키여서 동생은 돌연변이 소리를 듣고 자랐다. 내가 중학생이고 동생이 초등학생이었을 때 찍은 사진을 보면 네 명의 키가 모두 엇비슷하다. 네 명 모두 키가 155~165cm였을 시기이다. 남편은 이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크게 웃었는데, 나와 남동생에 비해 엄마와 아빠가 너무나도 작고 위축되어 보여서 그랬단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사진 속의 엄마 아빠는 지금의 우리 부부보다 어렸다. 심지어 5살 이상이나 어렸다. 몸과 마음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는 나와 내동생을 보면서 엄마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저 대견하기만 했을까, 아니면 지금의 나처럼 혼란스러웠을까?
아들이 한 인간으로서 성숙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그 모습 속에서 내가 늙어감을 느끼는 것. 아들의 성장과 나의 노화는 이렇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서 돌아간다. 아들이 나보다 클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는 나의 노화를 인정하기 싫은 마음도 일부 있지 않을까? 육아의 목표는 ‘독립’이라고들 한다. 나는 이것을 당연히 ‘자녀의 독립’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여기에는 ‘부모의 독립’도 포함되는 것 같다. 자녀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하고, 부모의 역할에서 서서히 벗어나 하나의 인간으로 바로 서고, 다양한 변화를 받아들이며 담담하게 미래를 준비하는 일. 모두의 독립을 준비해야 할 시기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