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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미치 Sep 27. 2017

음악은 유럽을 흔들고, 유럽은 나를 흔들고 #9

밴드 스위머스 유럽 투어 일지 #9. 클럽 자카란다, 리버풀


리버풀은 이번 투어의 메인 이벤트가 열리는 도시였다. 우리는 일요일 사운드 시티 무대에 앞서 토요일 저녁에 리버풀 시내에 있는 클럽 자카란다에서 다른 한국팀들과 함께하는 클럽 공연이 있었다. 이 공연을 필두로 우리의 강행군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클럽 자카란다와 사운드 시티 페스티벌 공연에 바로 이어서 런던과 리버풀 사이에 위치한 도시인 레스터에서 공연이 잡혀있었고, 레스터 공연이 끝나자마자 런던으로 돌아와 새벽 비행기로 독일 베를린에 가야 했다. 이 죽음의 스케줄 구간에서 우리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사건 사고들을 겪었다. 하지만 그 전조를 느끼지 못한 채, 리버풀에서는 몹시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안녕, 하크니 Bye, Hackney


리버풀에 갔다가 다시 런던에 돌아올 예정이긴 했지만 하크니와는 작별이었다. 일정 상 런던 시내에 있는 숙소를 잡아뒀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남짓 묵은 이 곳을 떠나면서 우리는 무척 아쉬워했다. 런던에서 많은 숙소들에 묵어본 것은 아니었지만 이 곳이 주변 환경과 시설면에서 두루두루 부족할 것 없이 좋다는 것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꼭 이런 객관적인 지표들 때문이 아니더라도, 정 들었으니까.



이동은 곧 짐과의 전쟁

Baggages Are Our Enemies

이 사진 속에 있는 빨간 가방 뺀 나머지 모든 가방이 다 우리 짐이다.

 

짐에 관해서는 정말... 힘들었다는 말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하크니 센트럴 역에서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을 거쳐 리버풀 원 버스 스테이션까지 짐들을 이고 지고 끌고 밀며 도착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이었다. 우리가 리버풀에 도착했을 때는 마치 종말의 날처럼 하늘은 우중충하고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Entering Liverpool


리버풀이 한국에도 워낙 잘 알려진 도시라서 나는 이곳도 런던만큼 크고 세련된 대도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서울과 부산이 결코 같을 수 없듯 리버풀도 런던과 무척 달랐다. 우선 우리는 시내에 숙소를 구할 수 없어서 노선이 하나밖에 없는 버스를 타고 20분 이상 가야 하는 외곽에 숙소를 잡았다. 시내에 숙소를 구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깔끔을 떠느라 까다롭게 골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숙소 자체가 런던에 비해 현저히 적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도착한 당일 저녁에 시내에 있는 클럽에서 공연을 해야 했는데, 우리 짐의 절반을 차지하는 악기들을 갖고 시내에서 외곽까지 갔다가 다시 시내로 돌아나오는 계획은 썩 훌륭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래서 동선이 길어지는 것을 감수하고 공연장에 먼저 들러 악기 짐을 맡기고 숙소로 출발했다. 샤워와 휴식이 절실했다. 휴식할 시간은 별로 없었지만 잠깐이라도 어딘가에 몸을 묻어야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직) 한 일이라곤 짐과 함께 이동한 것 밖에 없는데!




안필드 근처의 아늑한 집 Quiet and Cosy House near Anfield & Goodison Park


우리 숙소는 사진 속 중간 부분에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가서 약 200미터 정도 걸으면 나온다. 완전히 주거지역에 있는 에어비앤비였다. 위치나 교통편이 썩 좋지 않았지만 조용한 동네라는 점, 그리고 집이 무척 예쁘다는 점에서 우리는 만족할 수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한 노신사가 우리에게 집 안내를 해주었다. 집주인인 줄 알았더니 집주인은 여행을 갔고 자신은 이웃에 사는 친구라고 했다. 그는 처음에는 무뚝뚝했지만 나중에는 표정이 좀 풀렸고, 헤어질 때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나는 영국 하면 흔히 떠올리는 신사의 매너를 처음으로 경험한 것 같아 좀 신기했다. 그냥 옆집 할아버지가 아니라 신사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집을 둘러보는 영상을 선웅이가 찍었고, 신사분이 티브이를 작동시키려다 끝내 실패하는 모습이 담겼다.


숙소는 이층집이었다. 평강이는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큼직한 창문들이 정말 멋지긴 했다. 비 내리는 풍경을 지켜보게 하고, 해가 나면 햇살을 들여보내는, 사람의 공간이 건물 안쪽으로만 한정되지 않도록 해주는, 가능성의 마법을 부리는 장치. 창문은 그런 거니까. 나는 다음날 리버풀에 도착할 민지와 한 침대를 쓸 예정이었기 때문에 가장 큰 침대와 창문이 있는 가장 좋은 방을 쓰게 되었다. 런던에 와서 내내 네 사람이 한 방을 쓰다가 하루라도 나 혼자 방을 쓰게 되니 감개가 무량했다.





리버풀 시내에서 Downtown Liverpool

팀장님과 평강이는 먼저 시내로 출발해서 식사를 하고 클럽에 가보겠다고 했고, 나와 선웅이는 꽃단장을 하는 데에 시간을 좀 쓴 후 후발대로 출발했다.

 


공연장에 잠깐 들른 뒤 선웅이와 나도 저녁을 챙겨 먹으러 밖으로 나왔다. 나는 리버풀의 거리가 런던의 거리보다 정겹다고 느꼈다. 더 좋았냐고 하면 그건 모르겠지만, 런던과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런던이 강남대로나 가로수길, 혹은 경리단길 같다면 리버풀은 약간 덜 붐비는 홍대바닥 같았다.


초저녁부터 약인지 술인지 알 수 없는 것에 만취한 젊은이들이 여기저기 늘어져있고 한 블록 건너 한 블록마다 공연장의 라이브 음악 소리가 들렸다. 요약하자면 시끄럽고 젊었다.


선웅이와 나는 거리가 아직은 한산한 편인 약간 이른 시각에 패스트푸드화 되어 있는 케밥과 치킨버거를 먹었는데 정말 맛없었다. 하크니의 케밥집이 그리웠다. 그걸로 어딜 가나 시내는 시내인가 보다 생각했다.

 

 



자카란다 The Jacaranda, The Korea Take Over


비틀즈가 공연을 한 적이 있다는 클럽, 더 자카란다. 비틀즈의 데뷔 장소인 카번 클럽(Caven Club)이 근처에 있는데 가보지 못한 것은 아직도 아쉽다. 카번 클럽 대신 리버풀 사운드 시티 카번 스테이지에서 공연을 했으니 그걸로 만족하기로 한다. 자카란다도 좋았다. 자카란다는 2층에 레코드 매장을, 1층에는 펍을, 지하 1층에 무대를 조성해 놓은 큰 공간이었다.


공연장을 한바퀴 둘러보고 시간이 지나자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웨이스티드 쟈니스, 빌리 카터, 씽씽과 함께 하는 공연이었다. 다들 제각기 다른 날짜에 영국에 들어와 서로 다른 경로를 거쳐 이 낯선 도시에 와서 다시 조우하는 것이 반갑고 재미있었다.





공연 The Show

우리는 씽씽과 웨이스티드 쟈니스에 이어 세 번째 순서였다. 투어에 나서기 직전 출정식 공연이 떠올라 감회가 새로웠다.

 


자카란다에서 공연에서는 에피소드가 좀 있었다. 관객들 대부분이 위에서 술을 마시다 내려온 손님들이었는데, 그중 유난한 취객 두어 명이 나를 힘들게 했다.


우리 앞에 웨이스티드 쟈니스가 신나게 달리는 공연을 할 때 한껏 흥이 오른 아저씨 한 명이, 웨쟈와는 매우 상반된 분위기의 연주를 하는 우리 음악에 무리한 나홀로 춤판을 벌였고 중간중간 고성을 냈다. 나는 나대로 연주하고 노래하면서 그가 신경 쓰이고, 보는 사람들은 보는 사람들대로 불편해했지만 그가 딱히 무대에 난입을 한 것도 아니고 대놓고 훼방을 놓는 것도 아니어서 누구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나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황당하기도 하고, 어쩔 줄 모르겠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좀 짜증스럽기도 해서 전반적으로 굉장히 난처한 기분으로 무대를 끝냈다. 다음에 이런 상황이 또 생기면 그땐 좀 더 잘 대처할 수 있을까, 어떤 대처가 가능한 건가 오래 생각했지만 별다른 수는 없는 것 같다. 내가 관객인 공연장에서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 하니까. 


선웅이와 평강이는 우리가 웨이스티드 쟈니스 다음 순서로 공연하면 안 되는 거였다고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씽씽이 첫 순서인 것도 이상했다. 이번 사운드 시티 출정 팀들 장르 구성을 보면 역시 우리 팀이 오프닝을 해야 맞다. 음악 색깔이 다른 팀들과 묶이기에 전반적으로 좀 안 어울리는 것도 있고.


"영원을 믿지 않아도", "Happy Friday", 그리고 자카란다의 내부 전경이 함께 담겨있는 "장마"의 라이브 영상.



선웅이는 연주하다가 물을 쏟았다고 했다. 심벌 스탠드가 계속 밀려서 많이 고생했던 모양이었다. 장마 연주 끝무렵에 심벌 스탠드가 넘어졌다. 무대를 하고 있을 때에는 재앙 같은 일이었지만 이 장면이 기록으로 남겨진 것을 보니 느낌이 또 다르다.  




씽씽 Ssing Ssing


나는 출국 전부터 씽씽의 매력에 퐁당 빠져 팬심으로 인한 부끄러움과 낯가림을 무릅쓰고 두 번이나 같이 사진을 찍었다. 팀장님이 등을 떠밀기도 했고. 얼마 전에 씽씽은 미국 NPR 라디오 채널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라이브 세션인 타이니 데스크 라이브(Tiny Desk Live)를 했다. 세계로 뻗어나가지 않으면 이상할 팀이다. 멋져. 

( http://www.npr.org/event/music/551277265/ssingssing-tiny-desk-concert?utm_source=facebook.com&utm_medium=social&utm_campaign=nprmusic&utm_term=music&utm_content=20170921 )




리버풀 사람들 People in Liverpool

우리 팀 뒷 순서로 빌리 카터만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빌리 카터의 공연을 끝까지 보고 싶었지만 숙소로 가는 막차를 타기 위해서는 바로 나와야만 했다. 왠지 미안했다. 선웅이는 발길을 쉽게 못 떼면서 천천히 가다가 막차를 놓치면 다시 돌아와서 빌리 카터 공연을 보고 택시를 타자는 말을 하기도 했다. 물론 공연이 멋지고 신나서 보고 싶은 것이 기본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관객이 쉽게 들지 않는 이국의 클럽에서 동료 아티스트들의 객석을 채워주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그들이 우리의 공연을 지켜봐 줄 때 느낀 고마움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안정감이라든가, 안도감 같은 것을 주는 얼굴들. 우린 빌리 카터의 공연에 관객이 많이 몰릴 테니 괜찮을 거라고 서로 위로 아닌 위로를 하며 자카란다를 떠났다.


바깥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날이 약간 쌀쌀해 버스를 기다리는 대기소에 잠깐 들어갔다.


버스 대기소 밖으로 나왔을 때 정류장에서 노인 두 분이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악기와 함께 있는 동양인들이 생소해서 말을 시킨 것 같은데, 이분들은 우리가 공연한 클럽 자카란다에도 종종 가는 사람들이었고 사운드 시티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게 생소했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 라이브 클럽에 다니고, 도시에서 열리는 락페스티벌에 가고 싶어 하고, 그 페스티벌의 무대 이름들을 외우고 있는. 우리는 비틀즈가 태어난 도시에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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