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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미치 Sep 06. 2017

음악은 유럽을 흔들고, 유럽은 나를 흔들고 #8

밴드 스위머스 유럽 투어 일지 #8. 바람들


런던에서 공연을 하는 동안 나는 틈틈히 내 시간을 썼다. 공연 리허설은 대부분 늦은 오후부터였고, 나는 오전~이른 오후에는 시내에서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그래봤자 장소를 바꿔가며 앉아서 멍 때리는 일 정도였지만.


자유시간의 절반 정도는 혼자 보냈고, 절반 정도는 선웅이와 보낸 것 같다. 리버풀에 가기 하루 전날에는 세븐 시스터즈 절벽에 다녀왔다.




테이트 모던과 마크 로스코 Tate Modern & Mark Rothko



마크 로스코의 시그램 벽화들이 테이트 모던에 있다. 모네의 저 그림, <수련>을 발견하면 로스코의 방 입구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붉고 어두운 연작들이 걸려있는 로스코의 방에 한 시간 정도 혼자 앉아있는 동안 많은 풍경들이 지나갔다. 구석에 모여 앉아 한참동안 그림에 대해 이야기 하던 일본인 그룹이 나가고, 노인들을 모시고 그림을 설명하던 도슨트가 지나가고, 내 옆에 앉아 그림을 한참 보던 여자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고, 잠깐 혼자가 되는 순간이 몇 번씩 반복되도록 나는 그 곳에 있었다.





테이트 모던에는 말도 안 되게 멋진 화가들의 그림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나는 미술관을 돌아다닐만큼의 체력은 없었다. 이 날은 저녁에 공연도 있었고 나는 휴식이 필요했지 관광을 할 생각은 없었다. 로스코의 그림들을 보면 그 안에 너무 많은 감정이 담겨있어서 별로 치유되는 기분이 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속이 시끄러워지고 심한 우울감에 빠지게 되는데, 무슨 중독자처럼 이끌리듯 그 그림 앞을 다시 찾게 되는 것은 정말 이상하다. 그게 로스코의 힘이겠지.


누가 내게 말을 시켜서 로스코의 방을 벗어났다. 테이트 모던 바깥으로 나가는 길에 소리로 이루어진 작품들을 모은 기획전을 보았다. 들었다.  







스카이가든 Sky Garden Terrace

로스코를 보고 나는 심하게 우울해진 상태로 스카이가든에 들렀다. 런던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고층 건물 옥상 테라스는 을씨년스러웠다. 날씨가 맑고 쾌청했다면 조금 달랐을 것 같지만 애초에 런던을 대표하는 날씨는 그게 아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회색 하늘. 늘 어딘가에는 비가 내리고 있는 도시.

 











우리는 혼자 보내는 시간과 함께 하는 시간이 모두 필요했다. 

선웅이와 평강이는 유럽에 처음 오는 건데, 공연 준비만 하다 정신없이 오느라 뭘 해야 할지도 잘 모르고 온 것이 조금 안타까웠다. 내가 되는대로 런던에 온 관광객들이 할 법한 일들을 알려주고 또 가능한 한 데리고 다니려고 노력했지만 그건 꼭 마음처럼 될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같은 밴드 멤버여도 3주 동안 24시간 붙어있는 건 그렇게 행복한 일은 아니다. 특히 우리팀은 멤버 셋 다 개인 공간을 매우 중요시 하는 사람들이고, 서로에게 어떤 선을 침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내 시간과 공간을 보장받기를 원하기도 했다.


자유시간이 많았던 것은 아니지만 틈날 때마다 평강이는 숙소 근처 카페나 공원에서 혼자 시간을 자주 보냈고 선웅이는 EPL 축구 경기장 도장깨기를 하러 다녔다. 나는 나대로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일들을 했고, 가끔 미술관에 가거나 차를 마시러 시내에 갈 때 멤버들에게 같이 가겠느냐고 묻곤 했다.


평강이는 대부분의 제의에 거절표시를 했고 선웅이는 대개 따라나서곤 했다. 결국 나는 선웅이와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게 되었다. 대화도 많이 했고 티격대기도 많이 했다.


 


애프터눈 티 Afternoon Tea

하루는 애프터눈 티를 마시러 월러스 컬렉션(The Wallace Collection)에 갔다. 예전에 포트넘앤메이슨에서 마치 통과의례같은 애프터눈 티를 마셔서 이번에는 조금 더 여유로운 다른 곳에 가보고 싶었다. 책이라도 들고 가서 음악 들으며 차 마시는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일정이 살짝 빠듯했는데도 선웅이가 선뜻 따라나섰다. 여자친구가 차나 커피에 관심이 많아서 대리체험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티도 공간도 좋았지만 디저트는 맛이 없었고 더웠다. 가는 길에 너무 진을 빼서 도착하자마자 얼음물을 요청했다. 영국에서는 차가운 물을 쉽게 마실 수 없어서 찬 물만 좋아하는 나는 내내 몹시 힘들었다. 여기서 얼음물을 주었을 때 잠깐 겨우 행복했다. 하지만 저녁에 공연이 있는데 고작 차를 마시며 기운을 빼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우리는 서둘러서 숙소로 돌아가 공연하기 전까지 휴식을 취했다. 휴식도 의무인 날들이었다. 










스위스 코티지 Swiss Cottage

사흘간 공연을 끝내고 이번 투어의 메인 이벤트인 리버풀 사운드 시티를 위해 리버풀로 가기 전에 하루 통째로 자유시간이 있었다. 이날 나는 민지가 다니는 학교에 갔다가 세븐 시스터즈 절벽에 다녀왔다.

 


민지가 다니는 학교는 스위스코티지 역에 있었다. 하크니에서 런던 시내를 가로질러 대각선 반대편으로 올라가야 있는 꽤 먼 지역. 한번 들르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실행은 힘들 것처럼 보였는데,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생겼다. 전날 공연 때 민지에게 술 사먹으라고 나의 신용카드를 맡겨놓고는 돌려받는 것을 잊고 헤어진 것이다.


한심한 실수였지만 덕분에 약간 무리를 해서라도 친구가 생활하는 구역에 방문할 구실이 생겼으니 차라리 잘 된 일 같았다. 스위스 코티지 쪽은 하크니보다 훨씬 잘 사는 동네라 그런지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좀 더 평화롭고 안정된 느낌. 나는 민지가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며 인근의 분수대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을 한참 지켜보았다. 모두가 행복해보였다.

 


민지는 자기 학교의 학식이 최고라며 자랑을 했었는데 이 날의 메뉴가 이상하게 유난히 보잘 것 없다며 아쉬워했다. 그래도 좋았다. 신선하고 저렴하고. 민지가 사줬고. 같이 먹었고. 


나, 민지, 민지의 학교 절친인 조이.




세븐 시스터즈 절벽 Seven Sisters Cliff

이 날은 날씨가 너무너무 좋았다. 나는 세븐 시즈터즈에 갈까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너무 멀기도 하고, 기차며 버스며 가격도 조금 부담스럽고. 이 날은 전날 공연을 망친 다음날이라 기분이 엉망이기도 해서 하루를 어정쩡하게 흘려보내고 또 후회로 몸서리치기 십상인 날이었다.


오전에 민지를 만나 점심을 먹으며 이 얘기를 했더니 민지가 다녀오라고 딱잘라 말했다. 이렇게 날씨 좋은 런던이 흔한 줄 아냐고. 궁상떨지 말고 다녀오라고. 그래서 두말 않고 빅토리아 역으로 향했다. 내가 친구 말은 또 잘 듣는 편이라.


빅토리아 역에서 혹시나 싶어 연락을 했더니 선웅이가 마침 빅토리아 역이라며 금방 나타났다. 우리는 기차표를 끊고 영국의 남쪽 끝, 브라이튼의 하얀 절벽을 향해 갔다.

 



엉망으로 치른 전날 공연 때문에 멤버들 모두가 감정선이 좋지 않았다. 평강이는 평소에도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라 티가 안 났지만 선웅이와 나는 기분을 드러내는 편이었다. 이스트 본에서 갈아탄 버스가 우리를 세븐 시스터즈 절벽과 가장 가까운 정류장에 내려주고 그 곳에서부터 바닷가까지 걸을 때, 우리 둘 다 예민하게 날 서있던 마음이 조금 풀렸던 것 같다. 평강이가 같이 왔으면 좋았을텐데. 그 생각을 그때도 했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했다.



우리는 이스트 본 역에서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도시락으로 샀다. 그리고 절벽 끝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며 먹었다. 나름대로 도시락 싸서 등산한 느낌이었다.

 



대화들, 바람들 Conversations, Winds and Wishes

기차에서 내린 뒤 버스를 타서부터 절벽까지 걷는 길, 그리고 절벽 위에서 조금씩 영상을 찍었다. 우리는 짤막짤막한 대화들을 나누었고 종종 웃었으며 이내 바람에 묻혔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마음의 일부를 묻고 돌아오고 싶을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선웅이는 돌아오는 길에 소똥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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