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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미치 Aug 11. 2017

음악은 유럽을 흔들고, 유럽은 나를 흔들고 #6

밴드 스위머스 유럽 투어 일지 #6. 영국의 합주실, 그리고 첫 공연


출국 직전 주말에는 우리의 최종 합주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타이트하게 돌아가는 일정 중에 평강이가 아파서 응급실에 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다행이 평강이는 무탈하게 회복했지만 우리는 마지막 합주를 못했다. 사실 몇 달을 이것만 준비했으니 최종 리허설 한 번 안 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았지만 뭔가 깔끔하게 마무리 지은 느낌이 아니라 기분이 찜찜했다. 그래서 우리는 영국에 가서 합주를 한 번 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한국에서 구글링을 했고, 락의 본고장인 영국답게 런던에는 수많은 합주실이 있었다. 심지어 온라인으로 예약도 할 수 있었다. 우리 숙소인 하크니 인근의, 가격대와 시간대가 맞는 합주실을 하나 찾아 예약했다. 달스턴 스튜디오였다.  




달스턴 스튜디오 Dalston Studios


달스턴 스튜디오에 대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합주실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과 지상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2층에. 한국에서 나는 지하가 아닌 합주실을 본 적이 없다. 개인 작업실이 아니고서야 합주실은 대부분 지하에 있다. 서울의 비싼 땅 값과 소음 처리 등 이유야 여러가지 있겠지. 그런데 여기는 2층에만 적어도 여섯개 이상의 연습실이 있었고 소리 간섭도 거의 없었다. 복도로 나가면 햇빛이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고, 1층에는 카페와 비스트로의 야외 테라스에 앉은 사람들이 늦은 오전을 즐기고 있었다. 이 모습을 찍어서 보내주었더니 누군가는 지상낙원 같다고 했다. 


검은 철문이 달스턴 스튜디오의 입구다.


합주실 내부의 악기 스펙은 썩 훌륭하지 않았다. 더 비싼 합주실에 갔다면 또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여기는 그랬다. 믹서도 그저 그렇고, 엠프도 그저 그렇고, 사운드도 그저 그렇고. 그래도 뭐, 지금 그런 것이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합주실에서 우리는 몇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일단 나의 플라잉브이 기타가 비행기에서 무슨 수모를 겪었는지 줄이 떠서 버징이 심했고, 선웅이는 하이햇을 고정하는 클러치를 살 필요를 느꼈다.


한국 공연장들은 대부분 다 떨어져가는 심벌이라도 완전한 드럼세트를 갖추고 있다. 합주실은 악기 상태가 좋지 않으면 경쟁에서 밀리니까 더 그렇다. 영국은 대부분의 공연장, 그리고 합주실마저도 베이스와 탐탐 밖에 구비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도 없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우리는 악기를 거의 다 가져가서 그건 문제가 안 됐지만 클러치같이 작은 부품까지는 생각을 못 했다. 그래서 합주실에 있는 기본 드럼 키트에 클러치가 갖춰져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처음에 좀 당황했다. 사무실에 요청했더니 기다렸다는듯 빌려주긴 했는데, 선웅이가 왠지 이거 없는 공연장 많을 것 같다며 하나 사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선견지명이었다. 투어 내내 정말 유용하게 썼다. 


트러스 로드와 하이햇 클러치.

 




달스턴의 악기점 Music Store 


우리는 합주가 끝난 뒤 맥도날드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기타의 넥을 조절하는 트러스 로드(Truss Rod)라는 도구와 하이햇 클러치를 사기 위해 달스턴 스튜디오 근처의 악기점에 갔다. 짐이 너무 많아 이동하기에 나빠서, 선웅이가 대부분의 짐들을 지키며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나와 평강이가 움직였다. 


길을 물어물어 도착한 악기점은 (사장님 말에 따르자면)이사한지 얼마 안 되어서 내부가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이 일을 오랫동안 한 전문가가 운영하고 있다는 인상이 물씬 풍기는 장소였다. 사장님은 우리가 트러스 로드를 달라고 하니까 기타를 한 번 보겠다고 하더니, 트러스 로드 없이 브릿지 조절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며 단숨에 버징을 없애주었다. 그리고 그에 대해 한참동안 열성적으로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기쁘게 듣고 뿌듯해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준비가 끝났다. 다음날부터 공연이었다.






수리야 Surya


첫 공연은 5월 23일 런던 펜튼빌 로드(Pentonville Road)에 있는 클럽 수리야Surya에서 있었다. 공연장에 처음 도착했을 때 받았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공간 자체가 작은 것은 아닌데 관객석과 무대는 비효율적이라고 느껴질만큼 작았고, 모니터 환경도 믿을 수 없었고, 사실 모니터는 걱정거리도 되지 않을 정도로 하우스에 제대로 소리가 나갈지부터 의문이었다. 이거 어떡하지, 앞으로 영국 공연장들 다 이런 식인 걸까, 하고 단체로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엔지니어인 심바가 나타났다.





리허설 Rehearsal 


심바는 엄청난 사람이었다. 내가 여태까지 만나본 엔지니어들을 깡그리 잊어버릴 정도로 능력있는 프로페셔널이었다. 이렇게 작은 공연장에서, 혼자 드럼 하이햇부터 킥까지 모든 악기를 개별적으로 하나하나 체크했고 순식간에 우리 음악에 필요한 소리 균형을 잡아냈다. 우리의 몇가지 요구사항들이 전달되고 심바의 프로토콜에 따른 사운드 체킹이 끝난 뒤 리허설을 시작했을 때에는 모니터도 밖으로 나가는 소리도 놀라울 정도로 훌륭했다. 



목도 손도 덜 풀린 우리가 리허설을 시작했을 때, 윗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공연팀 관계자들과 스탭들이 드문드문 내려오더니 리허설이 끝날 때 즈음에는 좁은 계단과 객석 뒤쪽을 채우고 앉아 있었다. 나는 가끔 본공연보다 리허설이 더 좋을 때가 있다. 부담이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이 음악에 이끌린 사람들이 다가와 지켜보기도 해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첫 공연


한국이 아닌 곳에서 하는 첫 클럽 공연이었다. 설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설렘보다 걱정이 더 컸던 것은 나의 성격 탓이었을 거다. 놀랍게도 막상 무대에 오르니 초조함은 사라졌다. 어느 도시에 있든 무대는 내게 가장 위태롭고 안전한 공간이었다. 무대에 서면 나는 숨을 곳이 없고 도망갈 곳도 없다. 그런 감각은 묘하게도 어떤 안정감을 준다. 최소한 여기에 서 있는 동안만큼은 이 자리가 내 자리라는 약속이 있으니까. 최소한 지금은 내가 있기로 되어 있는 곳에 있다는 확신이 있으니까. 무대 위에 서면 바깥에 있을 때와는 다른 속도를 가진 시간 속에 들어서는 기분이다. 언제나 그렇듯 공연은 순식간에 끝났다.

  

테니스 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그리고 엔딩곡 Golden Roots of Your Tree + Woodstock.

평강이는 한 곡이 끝나면 허리를 깊이 숙여 꾸벅 인사를 하곤 했다. 난 그게 조금 좋았다. 




플라스틱 Plastic 


수리야 공연은 리버풀사운드시티의 프로모터에 의해서 기획된 공연이라 사운드시티에 출연하는 두 팀이 출연했다. 우리, 그러니까 스위머스와 플라스틱(Plastic)이라는 영국의 로컬 밴드. 맨체스터에 가까이 있는 윈포드 지역을 기반으로 한 팀이었다. 고등학교 친구들끼리 만든 밴드라고 했고, 사람들을 90년대로 데려가는 것 같은 음악을 했다. 너바나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이들의 음악을 싸이키델릭 그런지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우리팀이 먼저 공연했고 플라스틱이 다음이었다. 


플라스틱의 보컬인 매티가 우리 공연이 끝난 직후에 스위머스 티셔츠를 구매해서 입고 무대에 올랐다. 동료 밴드의 티를 사는 호의적인 몸짓도 좋았지만, 애초에 같이 공연하는 다른 팀의 티셔츠를 즉흥적으로 사서 아무렇게나 입고 공연하는 그 태도 자체가 정말 90년대적이라고 생각했다. 공연도 멋졌다. 특히 팀장님은 커트 코베인을 아주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라 이 밴드에게도 매력을 흠뻑 느낀 것 같았다. 매티의 표정과 퍼포먼스는 확실히 커트 코베인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았다. 단지 나는 커트 코베인이 살아 있을 때 뿜어내던 삶의 에너지를 모른다. 



마지막 곡에서 이들은 바닥으로 내려와 연주하다가 기타를 던지고 드러누웠다. 내가 화장실 간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중간 부분부터 울려퍼진 오아시스의 원더월(Wonder Wall)에 모두가 폭소했다. 플라스틱 멤버들이 공연이 끝난 뒤에 악기가 괜찮은지 살피는 모습을 보고 귀엽다며 선웅이가 몹시 즐거워했다. 




공연이 끝난 뒤 After the Show

수리야 공연은 관객이 별로 없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한국에서 규모있는 단독공연을 하는 유서 깊은 밴드들도 영국에 오면 예닐곱 명 앞에서 공연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들었다. 그런데 이 날 있던 소수의 관객들 중 한 여자분이 내게 다가와 자신은 한국에서 잠깐 산 적이 있고 그때 우리 음악을 들었으며 라이브를 보고 싶어서 오늘 왔다고 말했다. 영국인 친구와 함께 온 그 분은 심지어 영국인도 아니었다. 나는 예상치 못했던 만남에 너무 당황했고, 당황한만큼 기뻤다. 


관객이 적었다는 사실이 조금 아쉬울만큼 좋은 첫 공연을 마쳤다. 심바의 덕이 정말 컸다. 지구 반바퀴를 돌아 온 곳에서 한 첫 공연부터 좋은 엔지니어와 팬을 만났고 큰 실수 없이 무대를 마쳤으니 이 정도면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1층으로 올라와 간단하게 뒷풀이를 했고, 심바와 기념사진을 찍었고, 플라스틱 멤버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하크니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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