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스위머스 유럽 투어 일지 #5. 런던에서 하는 일
브릭레인에서 버스킹을 한 오후부터 약 이틀 간 우리는 약간의 자유시간을 얻었다. 그 동안 순수한 런던 관광객들이 할 법한 일들을 몇가지 했다.
아스날 대 애버튼 Arsenal vs Everton
버스킹을 끝내고 브릭레인을 벗어나는 길에 선웅이는 우리를 몹시 재촉했다. 나와 함께 아스날 구장인 에미레이트 스테디움에 가서 챔피언스 리그 진출 결정전을 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평강이와 팀장님은 구기종목에는 흥미가 없다며 숙소 쪽으로 돌아갔다. 경기 시작까지는 시간이 한참 남았지만 선웅이는 미리 가서 구장도 둘러보고 여러가지 기념품도 살 생각에 마음이 바빠 보였다. 티켓은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샀고, 배송지는 런던에 살고 있는 내 친구 민지의 집으로 요청해둔 상태였다. 그 말은 아스날 역에 가면 내가 근 2년 만에 처음으로 나의 절친과 재회한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나도 들떴다.
아스날 역 인근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영국이 축구 종주국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보통은 축구를 유난히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 정도의 인식이었는데 이곳에 가보니 축구는 그냥 이곳 사람들의 일상이었다. 경기가 있는 날 표가 있는 사람은 스테디움으로 향하고 없는 사람들은 그 인근의 펍으로 몰려들었다. 경기를 보러 가는 사람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부터 청소년들과 꼬마들까지 성별과 연령을 가를 수 없었다. 우리같은 외국인 관광객들도 상당수 보였지만 역시 주된층은 그 지역 사람들이었다. 그 거리의 축제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동영상을 선웅이가 찍었다. 내가 대학시절 연극을 할 때 만나 없이 못 사는 사이가 된 친구와 재회하는 순간이 담겨있기도 하다.
우리에게 표를 전해준 뒤 민지는 구장에서 약간 떨어진 지하철역 근처 카페에서 학교 과제를 하며 기다리겠다고 했다. 같이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걸 민지는 시간이 안 맞는다고 생각하곤 예매에서 빠졌다. 나중에 날짜를 착각한 것을 깨닫고 많이 아쉬워했지만 너무 늦어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경기 시작 전에 예정대로 기념품 판매점에 들렀다. 선웅이는 벼르고 벼르던 레플리카를 샀고, 경기가 끝난 뒤에 무료 마킹을 받기로 했다. 구경하던 나도 덩달아 머플러를 사고 말았다. 나는 아스날 팬도 아니고 머플러는 필요도 없는데... 선웅이의 기분에 함께 취했던 것 같다.
선웅이가 수완좋게 좋은 자리를 싸게 구했다. 덕분에 세계적인 축구 경기장에서 좋은 시야로 중요한 경기를 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훌리건들 때문인지 맥주는 절대 경기장 안으로 들고 들어갈 수 없었다. 그걸 몰랐던 선웅이는 거의 500ml에 달하는 생맥주를 샀다가 황급히 한꺼번에 벌컥벌컥 들이켜고 경기장으로 들어와야 했다. 나는 웬일인지 맥주 대신 콜라를 사서 반입하고 쾌적하게 경기를 볼 수 있었다.
이날 경기는 아스날이 수십년 만에 처음으로 챔스에 나가지 못할 위기에 처한 상태로 치르는 경기였다. 여기서 지면 아무런 희망이 없고, 여기서 이겨도 동시에 치러지는 다른 구장에서의 경기 결과에 따라 운명이 좌우되는 상태였다. 어쨌든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경기였다. 그래서 선수들은 비장했고 관객들은 과격했다. 반칙도 골도 많이 나왔다.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애버튼 선수가 공격적인 태클로 아스날 선수 한 명을 심하게 부상당하게 하고 레드카드를 받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쓸데없이 운 좋게도 그 순간을 동영상에 담을 수 있었다. 그리고 축구가 정말이지 생각 이상으로 과격하고 위험한 운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경기는 3:1로 아스날이 이겼다. 하지만 같은 시각 리버풀이 미들즈브러를 3:0으로 이겨 아스날은 챔스 진출에 실패했다. 이 사실을 알고 구장을 떠나는 팬들의 분위기가 오묘했다. 이겼는데도 진 분위기.
테임즈 강 산책
경기가 끝나고 우리는 테임즈 강변을 한바퀴 돌고 조촐하게 뒤풀이를 하기로 했다. 아스날역에서 워털루로 오는 지하철에는 드문드문 빨간 옷을 입고 아스날 팬임을 티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누가 봐도 관광객인 우리 역시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럽고 웃겼다. 시내에 도착해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는 어느덧 멀리서 저녁이 다가오고 있는 늦은 오후였다. 날이 좋았다.
이 날은 투어 내내 보냈던 시간들 중 손에 꼽힐만큼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날이 아닐까 생각한다. 거리에는 대체로 행복해보이는 사람들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요란하지 않은 쇼를 펼치는 길거리 아티스트들이 드문드문 퍼져 강변을 꾸미고 있었다. 나는 오래 전 기억과 향수를 간직한 공간을 다시 찾아와 걷고 있었고, 곁에는 소중한 친구와 멤버가 있었다.
나는 음악쪽으로 몸을 틀었지만 민지는 연극을 계속했고 지금은 런던의 RCSSD에서 극작을 공부하고 있다. 스위머스의 투어 기간 내내 민지는 학교 수업과 아르바이트를 뺀 나머지 모든 시간을 나와 우리 밴드와 함께 보냈다. 공연이 있는 날마다 매니저 역할까지 수행해서 팀장님이 알바비를 줘야 할 것 같다는 농담을 했을 정도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외지에 이토록 가까운 친구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에 대해 몇 번이고 생각했다. 런던을 잘 아는 현지인으로, 나를 잘 아는 정신적 버팀목으로, 민지가 여기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