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택을 줄이기 시작했다

더 빨리 가지 않겠다고 정한 이후, 나에게 남은 태도

by Late Realizations

더 빨리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날 이후에도

내 삶이 갑자기 안정되지는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여전히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감각이 먼저 왔고,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뒤처진 사람처럼 느껴지는 날도 많았다.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예전처럼

나를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그 불안을 처리하는 방식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나는 원래

선택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선택이 많다는 건

움직이고 있다는 감각을 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느끼는

무력함과 정체감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다.


그래서 나는

선택을 통해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이걸 해보자,

저건 놓치지 말자,

지금 아니면 늦을지도 모른다는 말들로

스스로를 설득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그런 선택들은

항상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필요해 보였고,

합리적이었고,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가장 빠른 길처럼 느껴졌다.


문제는

그 선택들이 쌓인 뒤의 모습이었다.


조금 앞서 간 것 같았고,

조금 더 많은 경험을 한 것 같았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면

늘 비슷한 지점에 서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의심했다.


왜 이번에도 여기일까.

왜 또 처음 같은 느낌일까.

왜 나는 항상

조금 더 가본 뒤에야

멈추는 걸까.


나는 그 질문들을

능력이나 의지의 문제로 돌렸다.



하지만 속도를 멈추고 나서야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혹시 나는

잘못된 선택을 한 게 아니라,

선택을 너무 쉽게 해온 건 아닐까.


불안할 때마다,

설명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 때마다,

그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선택으로 덮어버린 건 아닐까.



돌이켜보면

많은 선택들은

앞으로 가기 위한 결정이 아니라,

지금 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반응에 가까웠다.


선택은 방향이 아니라

탈출구였다.


나는 그 사실을

뒤늦게 인정하게 됐다.



그래서 방향을 바꿨다.


무엇을 더 할지를 묻는 대신,

지금의 내가 다시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 선택은 무엇인지

먼저 살펴보기 시작했다.


조급함이 올라올 때는

아무 결정도 하지 않았고,

확신이 없을 때는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으며,

불안한 상태에서는

속도를 올리지 않기로 했다.



이 변화는

눈에 띄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성과는 거의 없었고,

눈에 띄는 결과도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선택들 때문에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많이 나아가진 못했다.

하지만 덜 흔들렸고,

덜 망가졌고,

덜 후회했다.


예전에는

조금이라도 빨리 가기 위해

여러 번 돌아왔다면,

이제는

천천히 가는 대신

같은 자리를 반복하지 않게 됐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요즘의 나는

선택의 기준이 조금 달라졌다.


이 선택이

나를 성장시키는가 보다,

이 선택 이후에도

내가 나를 감당할 수 있을지를 먼저 묻는다.


그 질문 앞에서

확신이 서지 않으면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더 빨리 가는 선택을 하지 않게 된 이후,

나는 선택을 줄이기 시작했다.


아마 이 연재는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지를 말하기보다,

어떤 선택을 하지 않음으로써

나를 지켜왔는지를

차근히 기록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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